안녕하세요. 모든 분이 다 안녕하지 못한 줄 알면서도 인사드립니다. 서강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가르쳤던 강영안입니다. 이 코너의 이름을 ‘질문하는 삶’으로 정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챗GPT를 사용해 본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의 폭과 깊이가 달라짐을 경험했을 겁니다. 무엇을,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배움과 가르침의 첫걸음이 됩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중요한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판단과 분별입니다. 분별과 판단 없이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분들은 아시겠지요. 창세기 3장을 보면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수치심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찾아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처음 한 말씀은 질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고 물으셨다. ‘어디 있느냐.’”(창 3:9)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첫 말씀도 질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라오자 그분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요 1:38, 이하 새한글성경) 그러자 제자들은 질문으로 답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요 1:38)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오세요, 그러면 보게 될 것입니다.”(요 1:39)
질문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습니다.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살리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와 그의 상황을 인식하게 하고 다시 살릴 길을 열어 줬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을 보면 뱀도 질문을 던졌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니? 동산의 나무 열매를 하나도 먹지 말라고?”(창 3:1)
사실 하나님은 어떤 열매든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금했을 뿐 나머지는 자유롭게 먹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뱀은 교묘하게 질문을 왜곡해 하와를 걸려들게 했습니다. 질문이 항상 진리를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질문 자체가 거짓을 포함하고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마 22:17)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 22:28) 이들 질문은 단순한 지식 탐구가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더 깊은 진리로 이끄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반면 아담과 하와는 뱀의 날카로운 질문, 죽이는 질문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챗GPT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됐습니다. 단순한 정보나 지식을 찾는 것은 쉽고 빠르지만 보다 심오한 질문을 던질 때는 내 세계관, 내 인생관, 내 철학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챗GPT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어떤 방향으로 생각을 발전시키려 하는지를 질문을 통해 파악합니다. 질문을 하고 삶을 성찰할 때, 신앙과 철학, 세계관과 인생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합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이고 생명이란 것,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 그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에게 공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원한다는 것 외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혹시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봄이 오고 있지만 아직 봄 같지 않은 이 시기에 여러분의 평안을 빕니다. 묻고 또 묻지 않고는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살기 힘든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동대 석좌교수)
<약력>△미국 칼빈신학교 철학신학 교수 △서강대 명예교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P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