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적 교육기관, 민족을 깨우다

입력 2025-03-18 05:03
1888년 언더우드학당의 교사와 학생들의 모습. 언더우드학당 제공

1885년은 유교식 교육 체제가 저물고 근대 교육이 시작되는 분기점의 해다. 140년 전 부활절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교회 개척과 동시에 교육기관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근대 교육 기관은 신분과 성별의 벽을 허물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식과 독립정신도 고취하며 지도자를 양성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미션스쿨 재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것도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1895년 편찬된 개화기 국어교과서로 배재학당에서 사용한 국민소학독본. 배재학당 제공

최초의 교육기관은 1885년 8월 3일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이었다.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의 교명은 고종이 하사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여온 피아노. 배재학당 제공

이듬해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특히 여성 교육기관은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요원했을 일이었다. 이화학당이 문을 열자 배움에 목말랐던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학교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재학생이 46명으로 늘었다.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더우드학당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을 세웠다. 이 학당이 바로 지금의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의 모태다. 언더우드학당에서 시작한 교육 시설은 예수교학당과 민로아학당, 구세학당을 거쳐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닌 경신(儆新)이 됐다.


19세기 말부터 앞다퉈 세워지기 시작한 기독사학은 2023년 기준 399곳이다. 학교별로는 초·중·고등학교는 323곳, 대학교는 76곳이다. 이들 학교는 선교사를 비롯해 기독 독립운동가와 신앙을 가진 사업가 등이 설립했다.

명지대 교육미션센터장 함승수 교수는 17일 “선교사에 의해 학교가 세워지며 교육에서 소외됐던 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됐다”며 “교육을 통해 선교사들은 신분 사회의 벽을 깨뜨렸는데 1910년이 되면 지금의 북한 일대에만 660여개의 기독학교가 세워졌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났다”고 말했다.

교육은 ‘기독 시민 의식’이 뿌리내리는 데도 이바지했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는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에서는 수학이나 물리 등 학문뿐 아니라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교육을 했다”면서 “1919년 3·1운동이 전개됐을 때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의 활동이 이들 미션스쿨에서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초창기 기독사학이 지금까지 교육 기관으로서의 높은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교육적 탁월함이라고 꼽았다. 임 교수는 “미국 영국 등 당시 선진국에서 가르치던 수학이나 과학, 체육 등의 과목을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가르쳤다”면서 “숭실학교만 해도 실내 농구장이나 과학 실험실이 있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선진 농업교육이나 천문학 교육을 시행했다”고 밝혔다.

초창기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됐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경신학당 교장일 때 만든 교과서에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의 여정을 자세히 담았다. 유관순은 물론이고 김규식 안창호 주시경 등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민족을 깨웠던 지도자들은 이런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1916년 경신학교 지하 1층에 마련된 화학실험실 모습. 경신학교 제공

선교사들이 꿈꿨던 교육 이념은 지금도 구현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경신고에서 만난 한지민 교장의 방에는 ‘기독적 인격’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한 교장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학교를 설립한 이후 민족을 사랑하고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기독적 인격을 지닌 인재를 길러내는 게 우리의 인재상”이라고 말했다.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원성웅 옥토교회 원로목사는 배재중·고 교정에서의 6년이 자신을 목회자의 길로 인도했다고 말했다. 무속에 의지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한 원 목사는 “선생님들이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성품 교육’은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등록금을 못 내고 있을 때 교목실 담당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불러 등록금을 주신 일이 있었다. 일생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회상했다.

민족을 깨웠던 기독 사학이 정체성 위기에 놓인 건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2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명지전문대에 “채플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것은 종교 자유 침해”라고 결정한 데 이어 지난 12일에는 숭실대의 크리스천 교직원 채용 공고에 “종교를 이유로 한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숭실대에서 사용하던 동물학 교과서(왼쪽)와 베어드 선교사에 의해 번역된 천문학 교과서인 천문약해. 숭실대 제공

이윤재 숭실대 총장은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며 시대와 사회적 요구에 맞는 교육을 하는 게 큰 도전”이라며 “혼란스러운 시기에 변화와 혁신을 통해 학생들이 사회적 책임과 봉사 정신을 가진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효준 배재고 교장도 “미션스쿨의 고민은 기독교 신뢰도 하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섬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미션스쿨의 교육 본질인 신앙과 인성교육에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