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여당 초선 의원들에게 상품권을 나눠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취임 반년 만에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집권 자민당 내 비주류였던 이시바가 총리에 오른 배경에는 지난해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에 연루됐던 주류와 차별되는 ‘청렴한 이미지’가 있었다. 이런 이미지가 ‘상품권 스캔들’로 무너지자 당내에서는 오는 6~7월 주요 선거를 앞두고 총리 사퇴론이 거세지고 있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3일 도쿄 총리공관에서 자민당 중의원(하원) 초선 의원 15명과 간담회를 하면서 비서를 통해 1인당 10만엔(98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나눠줬다. 아사히신문이 이 내용을 보도한 뒤 이시바 총리는 해당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법적 문제는 없다고 주장했다. 현행법상 기부가 금지된 ‘정치활동’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14 일 참의원(상원) 예산위원회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국민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점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며 “재발 방지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에 대해 일본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산케이신문은 “이것으로 이시바 정권은 끝난 것 아닌가”라며 “불법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지만 해명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에 더해 이시바 총리의 정치자금수지 보고서에 기부자 주소가 잘못 기재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자민당 내 보수파를 중심으로 ‘이시바 끌어내리기’도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지난해 중의원 선거처럼 정치자금 문제가 전면에 부각될 경우 6월 도쿄도의회 선거와 7월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참패할 게 뻔하다는 당내 위기감이 크다. 이시바 총리에 대해 니시다 쇼지 참의원 의원은 “올해 예산안이 통과되면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오야마 시게하루 의원도 “진퇴를 포함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해 당 총재 선거 이후 최고고문으로 밀려났던 이시바 총리의 정적 아소 다로 전 총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소 전 총리는 지난 10일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과 만난 데 이어 모리야마 히로시 간사장과도 회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민당 관계자는 “모리 요시로 총리 퇴진 때와 상황이 겹쳐 보인다”고 말했다. 2000년 4월 취임한 모리 전 총리는 각종 논란으로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다 참의원 선거를 3개월 앞둔 2001년 4월에 물러났다.
야권은 내각 불신임안 제출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야권 일각에선 도쿄도지사 선거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새 얼굴과 맞서는 것보다 지지율이 낮은 이시바를 상대하는 편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대표는 내각 불신임안 제출 관련 질의에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다”고 답했다. 다만 입헌민주당의 다른 관계자는 가결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 서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