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 장비시장 지각변동… 한미반도체 콧대 꺾였다

입력 2025-03-17 00:21

고대역폭메모리(HBM)용 반도체 장비인 열압착(TC)본더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TC본더는 HBM용 D램 칩을 여러 겹 쌓을 때 열과 압력을 가해 칩이 정밀하게 접합되도록 하는 장비로,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 반도체 핵심 장비로 급부상했다. 그동안 전 세계 TC본더 시장은 한미반도체가 점유율 70%를 차지하며 독점해왔지만, 최근 한화세미텍을 비롯한 후발주자들이 존재감을 키우며 한미반도체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한화세미텍은 최근 SK하이닉스의 품질 검증(퀄 테스트)을 최종 통과하고 210억원 규모의 HBM용 TC본더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은 지난해 매출의 5.38% 규모다. 납품 기한은 오는 7월 1일이다. 정확한 납품 대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14대 안팎으로 추정된다. 한화세미텍은 이번 성과를 계기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 공급망’에 합류하게 됐다.

업계에서는 한미반도체의 TC본더 시장 독점 구조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미반도체는 지난 2017년부터 SK하이닉스와 함께 HBM 제조에 사용할 TC본더를 개발하며 이 시장의 일인자로 우뚝 섰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을 사실상 독점 공급하게 되면서 한미반도체의 영향력도 막대해졌다. 한미반도체의 TC본더 매출액 중 60% 정도가 SK하이닉스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화세미텍이 시장에서 TC본더 물량을 차츰 가져가게 되면 한미반도체 매출과 점유율에 작지 않은 타격이 가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한화세미텍 외에도 TC본더 시장에 진입하려는 후발주자들은 더 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는 반도체 장비 업체 ASMPT도 TC본더 장비로 SK하이닉스 공급망에 진입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ASMPT가 이미 지난해 SK하이닉스에 장비 관련 막바지 테스트 단계를 거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반도체 장비 업체들이 TC본더 시장에 공들이는 이유는 HBM 수요 증가와 맞물려 관련 시장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JP모건은 HBM용 TC본더의 시장 규모가 지난해 4억6100만 달러(약 6700억원)에서 2027년 15억 달러(약 2조1800억원)로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다양한 업체가 시장에 진입해 경쟁하고 공급망을 다각화하는 것은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유리한 조건이다. TC본더 시장 독점 체제가 완화하면 특정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거래 시 리스크를 줄이면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HBM의 길을 함께 갈고 닦아온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가 양사의 성장을 두고 서로의 공이라며 다투는 모습을 보였는데,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과 손잡으면서 한미반도체가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