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 2기 초반 가장 뚜렷한 성과를 내는 참모는 억만장자 부동산 사업가 출신 스티브 위트코프 백악관 중동특사일 것이다. 위트코프는 1983년 로스쿨을 졸업하자마자 로펌에 입사해 부동산 전문 변호사가 됐는데, 고객이 트럼프였다. 뉴욕의 한 식당에서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트럼프의 샌드위치값을 위트코프가 대신 계산해준 것을 계기로 둘은 40년 지기가 됐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지난해 9월 플로리다주의 본인 소유 골프장에서 두 번째 총격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됐을 때 바로 옆에서 라운딩했던 골프 친구도 위트코프였다. 위트코프는 지난 1월 트럼프 2기 백악관 참모진으로 합류하자마자 가자지구부터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험지를 마다하지 않는 광폭 행보를 펼치며 ‘두 개의 전쟁’을 끝낼 키잡이로 활약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도 전에 성사된 이스라엘·하마스 휴전 합의는 위트코프의 배짱과 추진력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당시 휴전 협상을 위해 카타르 도하에서 체류하던 위트코프는 금요일인 지난 1월 10일 밤 갑작스럽게 이스라엘 총리실로 전화를 걸어 이튿날 아침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의 회동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에서 매주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는 엘리베이터 단추도 누르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지켜지는 유대교 안식일이다. 이스라엘 총리도 안식일에는 외교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트럼프의 대리인이 다짜고짜 시간을 내라고 하니 네타냐후 측근들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네타냐후 측근들이 안식일 이후 만남을 제안했지만 위트코프는 단호하게 “내일 아침”이라고 거듭 말했고, 결국 토요일인 1월 11일 아침 네타냐후와 면담했다. 이후 네타냐후는 정보기관 모사드의 다비드 바르니아 국장에게 협상단을 꾸려 카타르에 가도록 지시했고, 불과 나흘 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휴전에 합의했다. 위트코프는 휴전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직접 확인하겠다며 지난 1월 29일 가자지구를 방문하는 대담함을 보여줬다.
러시아에 3년6개월간 억류된 미국인 교사 마크 포겔을 데려온 것도 위트코프였다. 의료용 마리화나를 소지했다가 마약 밀수 혐의로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은 포겔은 지난달 11일 위트코프의 전용기를 타고 미국 땅을 밟았다. 마중 나온 트럼프가 포겔과 나란히 사진을 찍으며 생색을 낼 때 위트코프는 카메라 앵글 밖으로 슬그머니 벗어나 스포트라이트를 대통령에게 몰아줬다.
출범 50일을 막 넘긴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J D 밴스 부통령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 수장 등 백악관 참모와 행정부 각료들이 저마다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만 위트코프만큼 잡음 없이 굵직한 성과를 낸 인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위트코프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3일 늦은 저녁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논의하기 위해 만날 때까지 8시간 넘게 기다리게 했다는 영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황제국 사신처럼 기세등등했던 위트코프가 트럼프의 대리인으로는 처음 홀대를 당한 셈이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1시간45분,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50분간 경험했던 푸틴의 지각에는 언제나 메시지가 있었다. 이번에는 미국과 우크라이나 사이에서만 합의된 ‘30일 휴전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부 의사와 더불어 트럼프의 주도권을 마냥 용인하지 않겠다는 경고도 담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푸틴의 위트코프 접견 지연 소식을 “구역질 나는 퇴물의 가짜뉴스”라며 대로했는데 그 험한 말 속에서 자존심에 입은 상처의 크기가 드러난 듯하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