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시스템의 위기

입력 2025-03-17 00:38

사법체계 빈틈을 파고든 尹
상식·관례 깡그리 무시 李
두 지도자 자정, 불가능하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현재까지 있었던 일련의 일들은 ‘대한민국 시스템의 무기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그리고 양대 정당과 극성 지지자들의 악다구니 앞에서 국가기관도 우왕좌왕했고 헌법과 법률도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헌법과 법률에 부합하느냐 여부는 헌법재판소 결론이 조만간 나올 것이다. 하지만 헌재가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이미 양 진영 모두 불복할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는 헌재나 수사기관들이 자초한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의 지도자답지 못하게 행동한 윤 대통령 책임이 크다.

계엄 직후만 해도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밝혔던 윤 대통령은 그러나 이후 계엄 선포 당시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부정선거론’을 꺼내 들며 강성 보수층과 손을 잡았다. 여기에 윤 대통령 변호인단과 국민의힘이 가세해 헌재뿐 아니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원, 검찰, 경찰 등 온갖 국가기관들을 비난하며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했다.

민주당이 공수처를 탄생시키려고 졸속으로 헝클어놓은 형사 사법체계의 빈틈을 윤 대통령은 잘 파고들었다. 내란죄 수사 권한이 어느 기관에 있는지, 구속 기간을 산정할 때 기준이 무엇인지, 즉시항고를 할 수 있느냐 등 난해한 법 이야기가 미디어를 뒤덮으면서 온 국민이 거의 반강제로 법 공부를 하고 있다.

계엄 수사의 적법성 논란 탓에 오히려 계엄 자체의 적법성 논쟁이 잠시 공론장 뒤편으로 밀려난 사이 윤 대통령은 석방됐고 마치 ‘구국의 영웅’인 양 지지자들에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마비시키려 했던 지도자가 수사기관과 싸움에서 1승을 거둔 뒤 세리머니를 하는 것 같았다.

시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치면 이 대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공직선거법 1심에서 이미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은 이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통령 선거를 향해 질주 중이다. 선거법 포함 5개의 재판을 받고 있지만 조기 대선이 치러져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헌법 84조에 규정된 불소추특권(재임 중 내란·외환 죄를 제외하고는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 뒤에 숨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을 것이다.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헌법 84조에 있는 ‘소추’에 재판까지 포함되느냐를 두고 또 한번 전 국민이 반으로 갈라져 논쟁하는 게 불가피할 듯하다.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수를 앞세워 이 대표의 재판에 걸린 법 규정을 바꿔 이 대표의 면소 판결을 유도할 거란 관측도 나온다. 이쯤 되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할 법도 한데 이 대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정치인이 여러 범죄 혐의로 수사기관의 수사를 받게 되면 잠시 정치 여정을 멈추고 사법적 문제를 털고 돌아오는 게 상식이고 관례였다. 하지만 이 대표는 이 상식과 관례를 깡그리 무시하고, 오히려 사법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몽골 기병처럼 진격하는 듯 보인다. 지난 대선 패배 직후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 보궐선거에 나가 국회에 입성하고, 자신이 폐지를 약속했던 불체포특권 뒤에 숨어 검찰 체포를 피했다.

이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은 현 정부 출범 이후 무려 29번이나 공직자 탄핵소추안을 냈다. 취임 3일 된 장관급 공직자부터 이 대표 수사를 했던 검사까지 대상도 다양했다. 하지만 헌재 선고가 내려진 8건 가운데 아직 인용된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국회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는 즉시 직무가 정지된다는 점을 악용해 국민이 만들어준 다수 의석으로 ‘정치적 갑질’을 일삼은 것이다.

두 지도자의 자정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제삼자가 혜성처럼 나타나 판을 뒤집을 가능성도 거의 제로다. 그러므로 해법도 역설적으로 결국 시스템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조만간 나올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이 부디 대한민국의 국가 시스템이 그래도 믿을 만하다는 희망을 주는 시작점이 됐으면 한다.

이종선 정치부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