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환송대

입력 2025-03-17 00:34

1960년대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 ‘환송대’를 봤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90년대였는데 프랑스문화원에서였는지, 어느 시네마테크에서였는지, 꿈에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 영화가 다시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환송대’는 시간여행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여러 중요한 장치들을 뒤로 밀쳐놓고 함부로 요약하면 어린 시절 환송대에서 한 남자가 죽는 모습을 보게 되는 장면이 영화의 시작이고, 말미에서는 그 이미지 속 죽어가는 남자가 곧 자기 자신이었다는 이야기.

소설이나 영화 등 숱한 텍스트 속에서 자주 변주되는 시간 개념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전혀 없다.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라 해도 무방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믿어버리고 마는 시간 개념은 훨씬 더 평면적이고 얄팍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순차적이라고 늘상 치부해 버린다. 시간성은 언제고 앎이 적용되지 못하는 앎의 영역 중 하나라는 점, 나는 이 점에 호기심이 있다.

수면을 취하는 동안 우리가 꾸는 꿈은 꿈 깬 아침에 가장 생생하게 기억된다. 그나마도 잠시 뒤척이며 꿈에서 가져온 삽화들에 이야기를 부여할 짧은 시간적 여유라도 있어야 가능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여유를 잃어버려 꿈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꿈을 꿨다는 것만 기억나고 내용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다 밤에 다시 수면을 취하기 위해 베개에 머리를 대어 까무룩 잠이 들려 할 때에, 어젯밤에 꿨던 꿈들이 떠오른다. 마치, 베개 밑에 숨어 있던 삽화들이 다시 돋아나는 것처럼. 꿈이 기억의 세계로 진입하는 데에 딱 하루만큼의 시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꿈 속 삽화가 물질일 리는 없지만, 이것들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번번이 재방문해 주는 데에 이유가 있을까. 어젯밤 꿈과 오늘밤 기억이 되어 나타나는 꿈, 그 사이에 낑긴 나의 현실 속 하루를 오늘은 ‘환송대’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