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저평가)’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발표 1년을 넘었다. 일본의 성공 사례를 참고해 야심 차게 추진된 밸류업 정책은 발표 초기 국내는 물론 외국인투자자에게도 환영받았다. 다만 밸류업 지수 설계 등 정책이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시장에 실망감을 안겼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에는 정국 불안으로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일보는 지난 10일 본사 대회의실에서 좌담회를 열고 기업 밸류업 정책과 관련해 학계와 업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와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최재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참석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시장에 긍정적 변화가 있었나.
△최재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문제의식이 확실해졌다. 상장사에 밸류업 공시를 하도록 한 것은 잘했다. 큰 그림은 좋다.
△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숙제나 시험이 있을 때 학생들이 뭔가 좀 더 열심히 하지 않나. 기업들에도 개별 임무가 주어지다 보니 일단 (주주로서) 말을 꺼내기 편하다. 주주가치 제고를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일부 상장사 사장은 주주의 돈을 공짜라고 생각한다. 주주의 돈이 공짜가 아니라는 메시지가 제시된 것은 긍정적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주주를 바라보는 관점과 문화가 바뀌고 있다. 물론 당장 바뀌기는 어렵다. 벤치마크 사례로 삼은 일본은 밸류업을 10년 넘게 추진했다. 우리도 얼마나 지속성을 가지고 추진되느냐가 중요하다.
-밸류업 정책에도 왜 지난해 주가는 안 올랐을까.
△김 대표=(정책이) 유화적이었고 인센티브가 없어서다. 선생님이 채점해 잘한 사람은 포상하고 잘못한 사람은 꾸짖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없었다. 지금은 밸류업 공시 자체를 했는지를 ‘○’나 ‘×’로 따져보는 수준이다. 심지어 밸류업 지수에 밸류업 공시를 하지 않은 기업이 상당히 많이 포함돼 있다. 밸류업 공시 이후 피드백이 약했다. 한국거래소가 주도하고 언론사와 리서치센터 등에서도 이런 일을 해야 한다.
△김 센터장=밸류업 공시를 한 기업이 100곳이면 (내용이) 괜찮은 곳은 20여곳에 그쳤다. 나머지는 성의는 보였지만 투자의사 결정에 도움이 안 됐다. 우리나라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장사가 40% 정도 된다. 일본은 시장을 구분해 ‘프라임’과 ‘스탠더드’에는 밸류업 공시에 대한 의무를 줬다. 반면 신생기업인 ‘그로스’는 의무를 지우지 않았다. 한국은 모든 상장사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집중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민간의 압력도 약했다.
△최 교수=재무정책을 바꾸는 것으로는 주가 상승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성 있고 혁신성 있는 기업이 나와줘야 한다. 지난해 미국 증시도 성장주들이 상승한 것이다. 한국 증시도 성장성이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얼마든지 재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대형주는 성장동력을 많이 잃었다. 한국은 가치주 중심의 시장이고 그런 측면에서 한국 증시가 (미국 증시 상승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최 교수가 지적한 혁신기업 부재의 원인은 무엇인가.
△김 센터장=(혁신기업이 많은 것은) 미국만이 가진 경쟁력으로 보고 있다. 미국을 제외하면 유럽과 일본, 중국도 우리와 형편이 비슷하다. 주주가치 측면에서 보면 삼성전자의 2021~2023년 배당 성향이 36%였다. 상장사가 배당을 많이 주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결국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 요인 중 하나로도 본다. 주주환원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 기업가치를 늘리기 위해 기업이 집중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김 대표=미국 애플의 주주환원율은 90%다. 자본을 슬림화한 상태인데 애플이 혁신을 못했느냐 묻는다면 아니지 않나. 한국의 주주환원율은 미국이나 호주, 대만은 물론 중국보다도 낮다.
-제도나 운영 측면에서 아쉬웠던 점은.
△김 대표=지금은 초기보다 밸류업 공시에 대한 분위기가 후퇴한 느낌이다. 구체적인 밸류업 계획까지 밝힌 상장사가 전체의 5% 안팎에 그친다. 사회적 압력이 약해서다. 밸류업 정책은 낮은 주주환원율 때문에 추진됐다고 본다. 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 등을 데이터로 만들어 순위를 매겨 발표해도 좋을 것이다. 증권사나 언론이 순위를 매겨 평가하고 피드백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김 센터장=기업이 장기적인 성장 계획을 주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한국은 지배주주와 소액주주가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미국의 행동주의펀드를 끌어들였다. 일종의 메기를 풀어서 일본이 성과를 낸 것이다. 일본은 최근 상장사 임원으로 ‘CSO’(Chief Shareholder Officer·최고 주주 소통 책임자)라는 역할이 생겼다. 주주와 소통하는 책무를 준 것이다. 지배주주와 소액주주가 대등하게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상법이든 자본시장법이든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최 교수=한국거래소나 정부를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재가치가 뛰어난 기업도 문제가 있다면 인수·합병을 당할 수 있고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는 시장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또 문제 기업은 퇴출해 자본이 혁신성장기업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주환원을 많이 해도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기업도 많다. 결국 펀더멘털이 문제라는 거다. 기업이 자본시장에 믿음을 주고 시장은 선순환이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에 대한 생각은(상법 개정안은 1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김 센터장=지배구조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이 상법 개정인지 자본시장법 개정인지에 판단은 못 내리겠다. 법 개정을 하면 기업들이 미국에 간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에서 한국 대주주들이 똑같이 행동하면 집단소송 걸려서 훨씬 망가질 거다. 종종 상장사가 주주들에게 보이는 태도가 절망적일 때가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최 교수=상법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넣는 것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소액주주도 각자 생각이 다르다. 테슬라 이사회에서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에게 76조4400억원의 급여 패키지를 준다고 할 때도 주주 의견이 엇갈렸다. 머스크를 보고 테슬라 주식을 산 사람은 주고 싶겠지만 회사의 유동성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면 의견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주주의 충실의무가 모호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정말 밸류업을 위해서라면 사모펀드가 적대적 인수·합병과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시장에 맡겨서 해결하는 것이 (법 개정보다) 더 좋은 길인 것 같다.
△김 대표=상법 개정의 당위성은 부정할 수 없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은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다. VIP운용은 한 회사의 10% 이상 주주였지만 회사 결정에 따질 방법이 단 하나도 없었다. 기존 법과 판례는 대부분 회사에 유리하게 돼 있다. 테슬라 사례처럼 판단의 문제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지배주주와 지배주주가 아닌 자 간의 부의 이전 문제가 있다. 두산그룹 지배구조 개편안만 봐도 그렇다. 소액주주가 모아놓은 돈을 지배주주에게 헌납해버리는 꼴이다. 이사회가 주주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이 법에 적히지 않으면 소액주주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이사회가 주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소액주주를 보호하기 위해 회사가 피해를 본 일은 없다. 상법 개정을 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다.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김 센터장=정권과 상관없이 밸류업이라는 이름은 계속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본질에 맞는 화두를 던졌으므로 이를 살려 나가는 것이 맞는다. 주주 요구가 과해 기업가치가 파괴된 사례를 하나도 떠올리지 못하겠다. 반대로 소액주주의 피해가 발생한 사례는 많다. 기업도 경영권 안정을 위해서라도 주가를 높게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상장사들이 공공의 돈을 받은 사람의 태도를 보였으면 한다.
이광수 장은현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