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양념과 암거래

입력 2025-03-14 00:32

지난해 8월 열린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연출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보낸 영상 축사가 나오는데 일부 당원이 “너무 길다” “빨리 끝내라”며 야유를 보낸 것이다. 이날은 ‘이재명 2기 지도부’가 꾸려진 날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당시 축사에서 “당내 경쟁에서 어느 편에 섰는지는 우리 대업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확장을 가로막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행태를 단호하게 배격하자”고 말했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 열기로 가득 찬 곳에서 이 대표 측 강성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배타적 행태에 대한 우려 메시지를 내는 전직 대통령 ‘직언’을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민주당을 출입해 온 기자의 시선에 민주당 출신 전직 대통령에 대해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민주당 ‘열성 당원’들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문 전 대통령은 불과 7년 전, 문재인정부 출범 당시 80%를 넘나드는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그는 ‘문빠’라 불리는 누구보다 강력한 팬덤을 보유했고, 민주당의 ‘온라인 당원 시스템’의 토대를 만든 주역이다.

이런 문 전 대통령을 향한 야유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터져 나오는 장면을 지켜보다 문득 2017년 4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선 경선이 한창이던 그때도 민주당은 강성 지지층의 공격적 행태로 몸살을 앓았다.

당 안팎의 우려가 커지고 있었지만, 그해 4월 3일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강성 지지층의 ‘18원 후원금’ ‘문자폭탄’에 대해 “그런 일들은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 경쟁을 더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후보’의 ‘양념’ 발언은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이 사람이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자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저녁 경선 경쟁자였던 안희정 캠프의 한 인사는 양념 발언에 대해 “민주당에서 제일 점잖다고 알려진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발언이라 믿기 어렵다. 언젠가는 친문(친문재인) 인사들도 저 ‘양념’에 똑같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정확히 7년 만인 지난해 4월 상당수 친문계 의원들이 이른바 ‘비명횡사’를 당했다.

요즘 이재명 대표를 지켜보다 보면 문득 2017년 4월의 양념 발언이 연상되곤 한다. 특히 지난 5일 그가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검찰 암거래’ 발언을 했을 때는 ‘이 사람도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확신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표는 그 방송에서 2023년 9월 자신의 체포동의안 가결 과정을 설명하다 당내 비명(비이재명)계와 검찰이 ‘다 짜고 한 짓’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면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민주당을 사적 욕망의 도구로 쓰고, 상대 정당 또는 폭력적 집단과 암거래를 하는 집단들이 살아남아 있으면 당이 뭐가 되겠느냐” “결국 총선에서 그게 다 드러나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로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총선 공천을 둘러싼 앙금이 여전히 당내 상당한 갈등 요소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검찰 암거래’ 발언이 민주당을 흔들었을 때,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던 인사를 만났다. 그는 “문재인은 ‘문파’를 앞에서 이끌었지만, 이재명은 ‘개딸’ 등에 탄 것에 가깝다. 등에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이 대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라 했다. 이 대표는 문 전 대통령이 지난해 전당대회에서 받은 야유를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최승욱 정치부 차장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