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 인천역 1번 출구에서 인천중부경찰서 방면 남쪽으로 햇살을 느끼며 걷는다. 경찰서 옆 항구 쪽 코너에서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을 만난다. 지금은 부두와 철로, 복개 도로로 변했지만 140년 전엔 이곳이 해안선이었다. 20대의 헨리 G 아펜젤러와 엘라 D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부근이다.
기념탑은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85년 준비 작업을 거쳐 이듬해 세워졌다. 기독청년회(YMCA) 총무를 역임한 오리 전택부 선생이 글을 썼다. “그들은 먼저 부활절날 여기에 도착하였음을 하나님께 고하고 사망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온갖 얽매임에서 풀어 주실 것과 그들에게 빛과 자유를 주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다.”
감리교의 아펜젤러,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동시에 시작된 한국교회는 이 땅에 발 디딜 때부터 교단 연합 즉 에큐메니컬이었다. 이후 한국교회는 민족 교육과 의료 봉사와 미신 타파를 우선으로 해서 순한글 성경을 펴내 문맹을 퇴치했고, 공산주의 반기독교세력과 퇴폐주의 사상의 와중에서 교회연합운동, 신앙진흥운동,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주일학교운동, 청년운동, 농어촌사업을 추진했다고 전 선생은 서술했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아와 피란민을 돌보며 전후 재건을 이끌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뒷받침한 것도 한국교회의 역사다.
기념탑에서 자유공원 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물론 수많은 선교사와 외교관들이 머물던 대불호텔이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생활양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한복 대신 양복을, 밥 대신 샐러드를, 한옥 대신 양옥, 나아가 국민 다수가 아파트에 살게 됐다.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영어를 공부하고 대한민국은 농업국가를 벗어나 K컬처를 자랑하는 지식산업국가로 성장했다.
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려다본 뒤에 바로 옆 인천 송월교회(박삼열 목사)를 찾아간다. 송월교회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기념하며 교회 옆 부지에 첫 선교사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 새긴 비석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1908년 펴낸 책 ‘조선의 부름(The Call of Korea)’의 한 대목이 새겨져 있다.
연세대의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운 언더우드 목사는 “지금 내 눈앞에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고 썼다. “장차 이 나라 방방곡곡에 사랑, 화목, 협동의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학교들이 보이고, 도시와 마을마다 자비량으로 운영되는 기독교 병원들이 보인다. 이 나라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긍휼을 베푸는 기관들이 세워져 고통당하는 자들을 섬기고 여기저기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모습이 보인다.”
국민일보는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며 ‘복음, 땅끝에서 피어나다’를 연재한다. 1부는 ‘이 땅에서 자란 복음의 열매’를 제목으로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회 학교 병원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디어 여성 등 새로운 문명의 장을 연 한국교회의 노력을 조명할 계획이다. 부활주일 이후 2부 ‘복음 들고 땅끝으로’를 게재한다. 종교국 기자들이 세계로 흩어져 제2의 언더우드, 제2의 아펜젤러를 찾는다. 세계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보도할 계획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으로 조선반도가 강대국의 핏빛 전쟁터가 되고 국권 침탈의 엄혹한 상황으로 내몰린 시국에서도 조선의 희망찬 미래를 확신했다. 그는 계속해 “이 나라가 힘 있고 복된 감화의 두 팔을 내밀어 한 팔로는 중국을, 다른 한 팔로는 일본을 껴안아 세 나라가 다 기독교 국가가 돼 모두 손에 손잡고 한 큰 원을 그려 어린 양을 영원토록 찬송하고,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를 소리 높여 찬양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우성규 종교부장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