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리의 시대다. 무엇 하나 그냥 흘러가는 것이 없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로 헬기를 동원해 군대를 투입한 그 순간부터 이 나라에서 순리는 사라졌다. 권위의 마지막 보루였던 법원조차도 폭도들에 의해 무너졌다. 현재 대통령 탄핵심판을 앞둔 헌법재판소마저 여론에 난도질당하고 있다. 연일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로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것처럼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더 많은 사람으로, 더 큰 목소리를 질러대면 질서는 무너지고, 그 틈바구니에서 내 것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전국이 들끓고 있다. 흥분한 대중이 광장을 메우고, 점점 더 고조된 폭력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 어디서도 이제 평범한 삶은 사라진 것 같다.
요즘 순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돌 맞을 일이란 것은 안다. 그래도 세상에는 순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순리를 따르는 것이 평안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사회의 흐름을 따라 몸을 맡기면 평안에 이른다는 상식이다. 요순시대 백성들은 왕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지 않는가. 누군가 힘을 써서 순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아귀가 맞아떨어져 가는 그 시대가 평안의 때였을 것이다.
한국인은 순리에 따라 사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래서 모두 함께 식당에서 자장면을 외쳤고, 남자들은 검은색 양복으로 하나를 이루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사회 흐름에 자신을 맡기며 살았다. 가끔 화가 치솟으면 역사를 바꾸기도 했지만, 그저 우리는 인내의 민족이라는 말에 따라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은 극단적이지 않다. 한국인에게 이 사회에 갈등이 있느냐고 물으면 90% 이상 심각하다고 답한다. 정말 사회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좀 떨어진 거리에서 살펴보면 이 사회는 상당히 신기하다. 그렇게 사회적 갈등이 심각하고 이념 갈등, 지역 갈등, 노사 갈등, 빈부 갈등이 첨예한데 드러나는 것은 외국과 비교할 때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뉴스에서도 자주 보지만 외국에선 데모가 발생하면 곧바로 폭력이나 반달리즘이 일어난다. 도시가 불에 타고, 상점이 약탈당하고, 치명적인 폭력이 동원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질서가 유지된다. 심지어 쓰레기를 치워놓고 가기도 한다. 외국에서는 이 정도 갈등이면 테러나 집단린치 등이 나타나고, 더 하면 내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런 극단적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인이 순리를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한 순리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서울서부지법에서 벌어진 일도 있고, 광장에서 외치는 선동이 범상치 않다. 헌재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이 사회에 순리는 남지 않을 것 같다. 이후 이 사회를 다시 한국이라는 공동체로 볼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다.
순리라고 하는 이 뜻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그 뜻을 알면 우리가 따라가려 한다. 그래서 순종은 기독교에 있어 가장 큰 덕목 중 하나이다.
요즘 광장의 소리를 들으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만 있다. 그리고 그 뜻에 하나님이 순종하길 바라고 있다. 하나님도 내 말 안 들으면 죽는다고 하는 시대이니 더욱 그러하다. 역사가 역리가 아니라 순리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오늘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겠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 목회사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