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나’라는 서술자

입력 2025-03-14 00:34

글쓰기란 혼잣말인 동시에
누군가와 나누는 말… 나를
세심하게, 깊게, 오래 봐야

나를 뺀 이야기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에세이스트인 나는 8년째 일인칭 서술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시작부터 그랬다.

첫 책에 자기 고백적인 글을 썼고, 그 글의 가치와 용도를 모른 채 그저 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나’를 썼다. 아기 새의 울음 같은 글이라고 해야 할까. 아기 새들이 우는 이유는 어미 새에게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기 위해서란다. 아기 새는 어미 새에게,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는 세상에 외친다. 나 여기 있어요.

이때 작가와 글 속의 ‘나’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한 사람, 하나의 목소리다. 작가들이 유독 첫 작품을 부끄러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작품과 작가의 분리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아와 작품은 어떻게 분리되어야 할까.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 어려운 질문에 힌트를 주는 작가들이 있다.

자전적 에세이를 쓰는 비비언 고닉은 작가의 경험을 원료로 삼아 성찰하는 존재, 글의 정체성이 되는 목소리인 ‘페르소나’의 필요성을 말했다.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글에는 광각렌즈를 장착한 듯한 시선이자 운명적 흐름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이야기꾼이 존재한다. 작가의 경험과 사고방식, 감각을 투영하지만 작가 그 자신은 아닌 존재, 우리는 그것을 서술자라 부른다.

나 역시 ‘나’에게 집중했던 시선이 나를 둘러싼 세계와 타인에게로 옮겨지면서 내 안의 서술자를 희미하게 느끼게 됐다.

글쓰기란 혼잣말인 동시에 누군가와 나누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이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기 위해 사회적 자아가 필요하듯 쓰는 이에게도 쓰는 자아가 있어야 한다. 쓰는 사람과 작품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서술자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살펴야 할 근원적 질문이 있다. 쓰는 자의 당위, 쓰고자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이다. 쓰기를 향한 나의 모호한 열망에 가장 밝은 등불이 되어준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었다. 울프는 글쓰기란 컴컴한 방을 작은 등불을 들고 걷는 일이라고 했고, 나는 등불을 비출 때마다 겨우 드러나는 흔적을 꿰는 일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자,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을 구하는 일이라고 해석했다.

작은 등불이 하나의 관점이고, 나의 관점이 누군가에게 동행하는 발, 발견의 눈, 감춘 곳을 들추는 손이 된다면, 그러기 위해 ‘나’를 도구로 쓸 수 있다면, ‘나’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쓰는 삶을 살면서 나를 외치는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더 오래 볼 수 있는 지구력이 생겼다. 내가 써야 할 모든 것은 사실 관점이 전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일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허구라는 방패막이 없다면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를 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관점을 의심하고 수정하고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세계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의 말은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 반듯하게, 세심하게, 깊게, 오래 봐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성공적인 글쓰기를 보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관점’을 다지는 글쓰기는 서술자를 성장시키고, 그 서술자는 쓰는 사람을 조금 더 나은 세계로 이끈다. 글쓰기란 방향을 정하고 그곳을 향해 옮겨 가는 일이 아닐까. 글의 시작과 끝이 같은 서술자는 없다. 반드시 어디론가 옮겨 가야 한다.

오늘도 나는 ‘나’를 뺀 글쓰기에 실패했지만, 나의 서술자는 쓰는 사람의 길로 조금 더 옮겨간 듯하다. 그 캄캄한 길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키운 것 같다. 무엇을 비출까.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 중에는 나를 닮은 당신, 혹은 나와 다른 당신도 있으리라.

그 얼굴들을 모두 엮으면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의 이야기, 그것은 ‘나’를 쓰는 사람의 희망이자 기대다.

신유진(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