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이야기다. 애견 ‘랭가’가 늙어간다. 어느 날 찾아온 백내장, 관절 장애, 발작 증세. 수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단다. 오후 내내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나더니 씩 웃더란다. 집 밖으로 나간 랭가는 휘청휘청 위태로운 걸음으로 비탈길 덤불 속으로 들어선다. 가시덤불을 지나 죽은 나무들 사이, 아늑한 곳을 찾아 엎드린다. 소리 없이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애견 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주인의 눈에 초점을 맞추며 바라보는 녀석의 두 눈에 고마움이 느껴진다. 녀석도 나도 알았다. 여기까지라는 것.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가게 하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글을 읽는 내 가슴도 먹먹해진다. 유기견이었던 자신을 정성스레 돌봐준 은혜를 알다니! 신비롭다. 배신 때리기 잘하는 인간 군상들은 이 글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증은 또 다른 궁금증을 낳았다. 어딘가에서 장렬한 죽음을 택한 동물의 사체(死體)는 누가 처리해 줄까. 산을 오를 때마다 나는 이 질문을 계속했다. 분명 산속에도 수많은 죽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산은 언제나 초록이다. 푸르고 깨끗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성영은 서울대 교수였다. 성 교수는 화학생물공학부 에너지 분야 공학자다. 그런 그가 곤충학자 이상의 글을 썼다. “자연에서 동물들이 죽으면 사체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야생에는 위생 담당자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사체 청소부들이지요. 개미나 파리 그리고 어디서 오는지 모를 납작한 송장벌레, 종종걸음을 치며 반짝거리는 풍뎅이붙이, 수시렁이가 떼를 지어 달려와서 모두가 열심히 악취를 풍기는 사체에 구멍을 뚫고 파헤쳐 다 분해해 버립니다.”(‘파브르의 안경’ 중)
송장벌레(burying beetle)는 딱정벌레의 일종이다. 시체를 묻는다고 해서 ‘매장충’이라고 한다. 몇 시간의 작업으로 두더지 한 마리가 땅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전 세계에 35만~40만 종(種)이 존재한다. 초식성 육식성 잡식성으로 나뉘는 딱정벌레는 전체 곤충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 하나님은 자연 생태계의 ‘사체처리반’으로 딱정벌레를 지으셨다. 이를 눈치(?)챈 파브르는 딱정벌레를 뛰어난 ‘연금술사’라 불렀다.
성 교수는 정찬(正餐)의 디저트처럼 상큼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보통 다른 곤충은 한 세대만 존재하는데, 가장 더럽다는 똥을 먹고 사는 곤충들과 함께 딱정벌레는 아비 어미와 새끼들이 동시에 같이 살아요.” 무슨 말인가. 궂은일 한다고 하나님께서 장수의 축복을 주신 게 아닌가. 그것도 종에 따라 3세대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생태계의 놀라운 신비였다.
어린 시절 나와 비슷한 세대가 듣고 자란 말들은 대부분 벌레(蟲)로 치부됐다. 늦잠 좀 잤다고 ‘잠충’이, 밥을 많이 퍼먹었다며 ‘먹충’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해충’ 같은 놈. 충충충으로 차고 넘쳤다. 욥의 친구 빌닷도 욥을 향해 조롱을 퍼붓지 않았던가.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욥 25:6)이라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던 곤충도 쓸모가 있는 하나님의 설계였다니. 나는 왜 이 나이에 이런 깨달음을 얻은 걸까. 이래서 늘 늦된 나는 ‘멍충’이가 맞다.
나도 한 번쯤 딱정벌레가 되어 ‘무용지용’(無用之用·쓸모없음의 쓸모)을 살아보고 싶었다. 백골화되거나 부패해 누군가의 청소가 필요한 사체의 수는 매년 수천 건에 이를 것이다. 고독사의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고립과 단절이 커가며 사회 생태계의 오·감염이 심각하다.
신학생 시절 채플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이 있었다. “아골 골짝 빈 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323장) 심장은 뜨거웠고 주먹 쥔 두 손은 핏줄이 터질 정도로 힘찼다. 그런 나는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딱정벌레처럼 수많은 아픔과 사연들을 안고 스러진 백골들 속으로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뛰어들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스승 예수를 배신 때리고 뒤늦게 통곡하던 베드로처럼 나도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을까. 걸레질하며 마음의 때를 벗겨내고 싶다. 빗질로 내 허위의식을 쓸어내고 싶다.
“주님의 세탁기에 나를 담그소서. 이 몸이 깨끗해져 나오리다. 나를 비벼 빠소서. 내가 눈같이 희게 살아가리다.”(시 51:7, 메시지성경) 속죄 의식을 거치고 나면 나도 작은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청소부가 된 성자들’, 내 간절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