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등단 이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2015), 문지문학상(2018), 현대문학상(2019), 한국일보문학상(2020) 등을 수상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백수린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최근 4년 동안 발표된 일곱 작품이 실려 있다. 작품마다 한 작가가 쓴 것 같지 않다. 인물이나 화자에 따라 미묘한 스타일의 변화를 주는 작가의 섬세한 글쓰기 스타일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눈이 내리거나 쌓여 있는 장면이 유독 많다는 것은 교정지를 읽던 중에야 깨달았다”면서 “소설집 전체를 아우를 제목을 정하며 눈이나 겨울이 들어간 단어와 문장을 오랫동안 곱씹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집 제목은 ‘봄밤의 모든 것’이 됐다. 그는 “겨울의 한복판이라도 우리는 볕을 찾는 사람이 되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자신의 산문 속 구절을 변형해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의 삶이, 이 세계가, 겨울의 한복판이라도 우리는 봄을 기다리기로 선택할 수 있다고. 봄이 온다고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고. 그런 마음으로 이 소설들을 썼다. 소설을 쓰는 사람인 한, 계속 그런 마음으로 써나가고 싶다.”
문을 여는 ‘아주 환한 날들’은 처음엔 반어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작가의 의도대로 희망의 빛을 읽을 수 있다. 일흔이 넘은 옥미는 평생교육원에서 수요일 오후 3시에 수필 쓰기 수업을 듣고 있다. 사실 그 시간이 아니라면 그 수업을 들을 일은 없었다. 여섯 달 전에는 수지침 수업을, 1년 전에는 영어 회화 수업을, 더 전에는 인터넷 수업을 들었다. 남편이 죽고 홀로 지켜오던 과일 가게를 6년 전 접은 이후 일과를 정교하게 짜놨기 때문이다. 옥미에게 지금은 “마침내 찾아온 평화”의 시간인 듯하다. 그 평화를 깬 것은 사위가 한 달만 맡아달라고 부탁한 앵무새였다. 앵무새와 동거하면서 그동안의 일상이, 행복의 평화가 아님을 깨닫는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앵무새를 보면서 사이가 틀어진 딸과의 관계가 더욱 도드라졌다. 수두 자국이 있어도 유일하게 예쁘다고 해준, 그래서 처음으로 사랑했지만 사고로 죽은 춘식이 삼촌의 옛 기억들이 그녀를 찾아왔다. 이제 앵무새는 사위네 집으로 떠났다. 그녀에게 변화가 생겼다. 쓸 게 없어서 한 줄도 쓰지 않던 노트를 펼쳐 “앵무새가 가버렸다”고 썼다. 그 문장을 보자 옥미는 너무 고통스러워 눈을 감아야 했다. 이제 그녀는 “새가 앉았던 자리만큼의 크기로 따스한” 마룻바닥을 느끼게 됐다. 아마도 옥미에게는 무미건조한 평화가 아닌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소설들 속 인물에게는 옥미처럼 저마다의 ‘상실’이 배어 있다. ‘빛이 다가올 때’에서는 평생을 시력 잃은 엄마를 돌보고, 엄마의 꿈이었던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일상을 포기한 ‘인주 언니’가 등장한다. ‘흰 눈과 개’에서는 “아빠는 위선자예요”라고 차갑게 내뱉었던 딸과, 그날 이후 8년 동안이나 소통이 없었던 아빠가 나온다. 교환 교수로 미국 뉴욕에 살던 때 인주 언니에게 “황홀한 감정”을 선사한 것은 스무 살이나 어린 미국인 남성을 향한, 늦은 나이에 처음인 어설픈 사랑이었다. 아빠와 딸을 화해로 이끈 순간은 세 다리로만 힘차게 달려나가 눈밭을 뒹굴던 한 마리 개의 생명력을 “다정한 공모자처럼” 서로 “잠시 눈빛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목격하던 때였다.
마지막 수록작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한 동아리에서 함께했던 네 명의 친구들이 1박 2일 여행을 떠난 이야기다. 그들이 추억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청춘 시절의 이야기는 허무와 공허가 배어 있다. 12년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첫 아이를 잃은 후 무력감에 시달리던 주미는 친구들에게 독일 소도시에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벽난로 속에서 분명 날갯짓 소리를 듣고 공포의 밤을 보냈지만 벽난로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주인의 연락으로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다. 비둘기였고, 이틀간 몸부림치다가 “상처 없이 기적처럼” 날아갔다는 사실을. 작가는 주미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 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