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사회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광장에서도 온라인에서도 터져 나오는 것은 분노다. 분노 사회, 분노 세대, 분노 범죄 등 ‘분노’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키워드가 된 듯하다. 영국 골드스미스런던대의 영문학·비교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저자는 문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분노의 내밀한 기원을 파헤친다.
저자는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에서 터져 나오는 뉴스 헤드라인에서 주변 길거리, 친밀한 정신분석 진료 공간에 이르기까지 ‘분노의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간다”면서 “이 책을 쓰는 것은 이 경험을 이해하고, 인간 존재의 보편적 경험에서든 우리 자신이 발끈하는 순간에든 우리가 어떻게, 왜 분노에 휘둘리는지 생각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선 분노의 의미를 조망한다. 우리는 분노라고 하면 공격을 연상하고 심지어 둘을 혼동하기도 한다. 공격과 분노는 엄연히 다르다. 공격은 분노와 달리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 저자는 “공격은 외부 대상에 지배력을 행사하거나 적개심을 표출하려는 시도, 머리끄덩이 잡아 뜯기, 조롱하기 등으로 언제나 바깥세상에서 표출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분노는 무엇보다 감정이다. 표현될 수도 있지만 숨길 수도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분노를 묵묵히 삼킬 수도 있고, 스스로에게 돌릴 수도 있고, 뚱한 표정이나 지나친 정중함이나 익살스러운 장난으로 감출 수도 있고, 화났다는 사실을 자신조차 모를 정도로 억압할 수도 있다. 정리하면 공격은 분노를 표현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고, 분노는 우리가 느끼는 것이고 공격은 분노를 느낄 때 하는 행동이다.
분노에는 ‘의로운 분노’가 있다. 저자는 상담실로 찾아온 빅터라는 인물을 통해 의로운 분노의 본질과 치유 가능성을 탐색한다. 토목회사에 근무하는 빅터는 공공시설 안전 자문을 해주고 있다. 최고의 전문가지만 무뚝뚝하고 거만하고 남을 무시한다는 동료들의 불만에 억울하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는 팩트를 강조했고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오류를 바로잡는 데 타협이 없었다. 저자는 “분노는 가장 옳게 느껴지는 순간에 가장 위험하다. 자기 확신에 단단히 틀어박힐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라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마음 상태에서는 분노가 뚜렷한 공격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빅터가 괴로워한 지점은 “자신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을지도 모르고, 자신이 전적으로 옳다는 사실이 실은 자신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의식(半意識)적 직관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자는 “우리가 옳다는 걸 인정해주지 않는 것보다 더 잔혹한 고통은 없다”고 말한다.
빅터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는 프로이트가 말한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여성성’은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성별의 의미가 아니라 ‘수동성과 수용성을 향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정신병의 ‘근원적 암초’를 ‘여성성의 거부’와 동일시한다. 저자는 “수용성을 가로막는 장벽 중에서 자신이 옳음을 아는 것보다 더 철통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치료 과정에서 빅터에게 일어난 변화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눈물에는 문을 닫아걸었지만, 딸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치유할 수 없는, 팩트에만 주목하면 오히려 덧날 수 있는 위험과 상처가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분노의 다른 유형으로 ‘실패한 분노’와 ‘냉소적 분노’를 제시한다. 실패한 분노는 분노 배출이 실패해 분노가 갈 곳이 없어진 상황을 말한다. ‘긍정적 사고 전도사’나 ‘분노 관리자’를 자처한 사람들은 분노 자체를 없애거나 분노를 통제하라고 한다. 하지만 문제점은 “개인과 집단의 삶에서 분노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부정하고 위장하고 전치(displace ment)하는 분노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좌절한 분노는 정서적·정치적 조종과 악용에 취약해지는데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냉소적 분노’다. 냉소적 분노는 극단주의자들이 ‘외부의 적’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거나, 타인의 고통에 잔인한 조소를 날리는 형태를 취한다. 저자는 이를 전 세계에 횡행하는 음모론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우리는 분노와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그 해결의 열쇠를 저자는 ‘아라비안나이트’로 불리는 아랍의 고전 ‘천일야화’ 이야기에서 찾는다. 이야기 속 샤흐리야르 왕은 왕비의 불륜을 목격한 후 여성에 대한 증오로 매일 밤 새로운 처녀와 동침한 뒤 다음 날 처형하는 잔혹한 행위를 반복한다. 상황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 왕에게 가겠다고 자청한 샤흐라자드는 첫날 밤 왕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고,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 때 날이 밝자 이야기를 마치지 않고 멈춘다. 이렇게 1000일 동안 반복되고 1001번째 밤에 모든 이야기를 끝내며 자신이 왕의 세 아들을 낳았음을 알린다. 결국 왕은 그녀를 정식 왕비로 맞이하고, 폭정을 멈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이 겪는 고통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목소리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분노는 나머지 모든 것을 마음의 귀로부터 차단하고 배제한다”면서 “그 목소리들이 들리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천일야화 이야기에서 샤흐라자드는 미지의 목소리, 이야기, 세계를 보여주면서 왕을 분노의 쳇바퀴에서 구해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매 순간 왕은 분노의 노예로 샤흐라자드를 죽이든지 결말을 듣기 위해 하루를 더 허락하든지, 즉 분노와 욕망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 했고, 이것은 왕이 스스로의 감정 상태에 귀 기울이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취약함과 자기 의심을 부정하기보다는 끌어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불어 타인을 화나게 하는 것을 무조건 피할 일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 진정한 호기심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만이 분노는 쓰임새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유용한 분노’다.
⊙ 세·줄·평 ★ ★ ★
·분노에 대한 통찰이 참으로 현란하다
·분노로 차단된 다양한 감정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적잖이 난해하니 정독, 재독이 필요할 듯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