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 도전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고 꽤 놀랐었다. 트럼프와 측근들이 호텔방에 둘러앉아 TV로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보는 장면인데,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그 무리에 섞여 있었던 것.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지, 원래 정치 성향은 트럼프와 맞지 않았을 텐데 바뀐 건가, 언제부터 그의 측근까지 됐지 하는 의문이 이어졌다.
스톤은 트럼프와 동갑(1946년생)인 노감독으로 전성기는 오래전에 지났다. 하지만 한창때는 대단했다. ‘플래툰’(1986) ‘7월 4일생’(1989) ‘JFK’(1991) ‘도어즈’(1991) 등의 작품으로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 반골 기질이 강하고 베트남전 참전 경험으로 반전(反戰) 의식도 강하다. 기득권 엘리트에 대한 반감, 그리고 미국이 개입하는 전쟁을 몹시 싫어한다는 점에선 스톤과 트럼프가 통할 수 있겠다.
스톤은 미국 대통령에 관한 영화도 많이 만들었다. ‘JFK’(존 F 케네디)와 1995년작 ‘닉슨’(리처드 닉슨), 2008년작 ‘W’(조지 W 부시)가 그것이다. 트럼프에 관한 영화도 언젠가 만들지 모른다.
스톤의 대통령 영화들에서 트럼프와 연결되는 부분을 찾아봤다. 우선 ‘JFK’는 저 유명한 케네디 암살 음모론을 다룬 작품이다. 케네디가 베트남에서 철군하는 것을 우려한 군산복합체가 그를 암살했다는 얘기다.
막후의 음침한 세력이 미국을 좌지우지한다는 음모론적 세계관은 트럼프도 공유하는 게 분명하다. 그가 척결 대상으로 언급하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가 그런 흑막의 세력을 뜻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대통령을 다룬 ‘닉슨’에서 닉슨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묘사된다.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울부짖는 대통령이다. 닉슨과 트럼프가 뭐가 비슷할까 싶지만 아웃사이더 기질을 비롯해 의외로 통하는 지점이 많다. 닉슨은 196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국방비를 삭감하고 유럽 주둔군을 감축하며 연방정부를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고 외친다. 지금 트럼프가 하고 있는 일과 똑같다.
또 영화에서 닉슨은 “중국과 소련을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권력의 균형과 다음 세기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닉슨과 그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마오쩌둥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지금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고 러시아와 밀착하려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많다. 관계 개선의 대상만 중국에서 러시아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역키신저 전략’으로도 불린다.
2017년 스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직접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내놨다. 이 작품은 “아첨은 많지만 회의(懷疑)는 거의 없다”(뉴욕타임스) “스톤의 카메라 앞에서 푸틴은 슈퍼스타였다”(르몽드)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푸틴에게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스트롱맨’ 푸틴에 대한 트럼프의 태도 역시 그러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인이 트럼프에 공명한 부분을 찾아본 것은 연일 세계를 뒤흔드는 트럼프가 도대체 왜 저러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 이유를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미국이 선택한 길인데 누가 막을 수 있겠나. 다만 걱정될 뿐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동맹에 등을 돌리면서 ‘서방’의 개념이 사라진 자리를 강대국들 간의 폭력이 채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도 당연히 이 폭력의 자장 안에 있을 것이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