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아일랜드인 조셉 스크리븐은 고향 마을에 사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조셉의 약혼녀는 말을 타고 그를 만나러 갔고 조셉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는 순간 갑자기 말이 펄쩍 뛰어오르는 바람에 그녀가 강으로 빠졌다. 조셉은 약혼녀의 이름을 부르며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차디찬 주검이 돼 있었다. 충격이 컸던 조셉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후 그곳에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1854년 조셉은 엘리자 로쉐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병에 걸렸고 결혼식은 계속 미뤄졌다. 3년이 지난 후 그녀는 죽고 말았다.
그는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다시는 누구한테도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조셉의 어머니는 아들의 상처 받은 마음을 걱정했고 그는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마음을 쓸까 염려했다. 조셉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시를 한 편 썼다. 그 시는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찬양 가운데 하나가 됐다.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지신 예수님/ 우리는 얼마나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가/ 기도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니/ 얼마나 큰 특권인가/ 아, 우리는 너무나 자주 평안을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구나/ 이것은 모두 기도로 하나님께/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로다/ 시련과 유혹을 받고 있는가/ 어디선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네/ 기도로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네/ 우리의 모든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신실한 친구를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계신다네/ 기도로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네.”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조셉의 친구가 서랍에서 다음과 같은 조셉의 메모를 발견했다. “이 시는 주님과 내가 함께 지은 것이다.”
고통 앞에 문 닫고 돌아서는 하나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할 때 상실감과 절망으로 가슴을 쥐어뜯을 때 기도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잃고서도 모든 고통과 슬픔, 연약함과 짐을 기도로 주님 앞에 갖고 가야 한다고, 주님은 참 좋은 친구라고 고백하기 쉽지 않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저주도 퍼붓고 포악질도 하고 원망도 하며 존재를 의심하기도 한다.
남편과 사별한 뒤 20대 외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은 작가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몸부림친다. “하나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란 하나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해.”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도 아내가 암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잠시나마 하나님을 의심했다. 그는 “당신의 필요가 절박한 때, 다른 모든 도움이 소용없을 때 그분께 나아간다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당신의 면전에서 문이 쾅 닫히고 다음엔 빗장을 거는 소리와 또 한 번 안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난다. 그런 후에는 정적이 흐른다. 이제 당신은 돌아서는 편이 낫다. 그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헤아려 본 슬픔’에서 절규했다.
기도는 자판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너무 바빠서 내 기도를 못 듣고 계신가. 자동차 소리와 지구상의 소음이 너무 커서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간에 차단되는 것은 아닌지. 지구상에 81억명 인구가 사는데 어떻게 한 분이 모든 기도를 들을 수 있는가. 아무리 기도해도 귀 막고 주무시는 것 같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좌절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 듣는 기도는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를 모두 듣고 계신다.
작가이자 목사인 피트 그리그는 아내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갑작스러운 발작과 경련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5년간 고통스럽게 지켜보면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와 일하시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작용하고 있고 선과 악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는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란 책에서 “어쩌면 당신이 응답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기도들이 사실은 응답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대해 엄격하지만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노(NO)’라고 답하셨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적적인 응답이 일어나든 아니면 고통과 침묵이 계속되든 하나님이 세미(아내)의 질병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 했다.
스코틀랜드 작가 PT 포사이스도 “언젠가 우리 모두는 천국에 갈 터인데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셨던 것이 그 기도에 대한 가장 진실한 응답이라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기적인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위험한 물건을 빼앗긴 아이가 엄마한테 그것을 다시 달라고 투정하고 떼를 쓸 때 어느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겠는가. “구하고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 4:3)
미국 베리타스포럼에서 콘텐츠 부대표를 지낸 레베카 맥클러플린은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에서 기도를 요술 방망이로 생각하는 태도를 꼬집는다. “우리는 기도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님은 우주적 자동판매기여서 기도를 투입하고 자기 손바닥에 결과가 떨어지기를 기대하거나, 기대한 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며 기계를 걷어찬다”고 했다. 세상의 즐거움과 환락에 빠져 하나님을 지하실 한 귀퉁이에 방치해 놨다가 급할 때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면서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케세라세라’(될 대로 돼라) 하신다고 비난한다.
성경 속 기도와 응답
나사로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때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때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예수는 이 소식을 듣고도 바로 가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 지 나흘이 됐을 때였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1~22)고 믿음을 고백한다. 예수는 눈물을 흘리셨고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며 나사로를 살리셨다.
예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마르다가 자기 상황을 바꾸는데 이용할 수 있는 도구도 아니다. 예수가 목적이고 마르다의 상황이 마르다를 예수께 몰고 간다. 그러면서 고통 속에서도 그분을 발견하게 된다. 맥클러플린은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낸 사이의 공백은 마르다가 예수께서 진정 어떤 분인지를, 즉 자신의 생명이심을 보게 하는 공백이라고 말한다.
더 큰 계획이 있을 때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신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잡혀가던 날 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다. 사랑하는 독생자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셨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는 더 큰 뜻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리라”(출 3:7)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까지 4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라고 기도했다.
이 말씀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설령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믿음을 보여준다.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