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탄핵 사태 겪으며
헌정 시스템 정상적 작동
안될 수 있다는 사실 깨달아
권력은 남용될 수밖에 없는데
'선한 권력'에 홀린 것 아닌가
이대로 대선 치를 수 없어
모든 후보가 구체적인
개헌안과 일정 제시토록 해야
헌정 시스템 정상적 작동
안될 수 있다는 사실 깨달아
권력은 남용될 수밖에 없는데
'선한 권력'에 홀린 것 아닌가
이대로 대선 치를 수 없어
모든 후보가 구체적인
개헌안과 일정 제시토록 해야
법원의 윤석열 대통령 구속취소 결정에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진영 갈등이 더 심해졌다. 헌재의 판단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 군대를 동원해 헌정 질서를 뒤엎으려 한 윤 대통령이 복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특수부대가 유리창을 부수고 국회에 진입하는 장면이 생중계 됐는데 뒤늦게 꺼낸 ‘계몽령’이라는 변명이 인정되겠는가. 그런데도 야당 의원들이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단식·천막 농성까지 나서는 것은 결국 선거 때문이다. 만일 윤 대통령이 파면되면 그날부터 대선까지 남은 시간은 2개월에 불과하다. 대권을 향한 전쟁은 이미 시작됐고, 잠시의 주춤거림이 큰 낭패를 부른다는 것을 다들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탄핵 정국을 대선 정국으로 전환해도 괜찮은 것일까.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자 축제인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잔칫상을 펼 수 있을까.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헌정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뿐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 헌법 규정에 따라 설치된 헌법기관들이 권력투쟁에 앞장서고 제 잇속만 챙길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커졌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회 권력을 힘으로 제압하려 한 대통령과 대통령 권한대행에 이어 대행의 대행까지 탄핵하겠다고 폭주하는 야당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권력 추구가 본질인 정치인들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혀를 찼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는 ‘제어받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남용된다’는 평범한 격언을 잊고 있었다. 어쩌면 대커 켈트너 버클리대 교수가 정의한 ‘선한 권력’, 이타심에 기반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권력이라는 말에 낭만적으로 심취했을지 모른다.
최근 드러난 선한 권력의 남용 사례가 바로 선거관리위원회다. 독재자에 맞서 싸울 때 선관위는 국민이 먼저 보호했다. 출범 이유가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였으니 당연했다. 누구도 권한 남용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 있을 때마다 힘을 더 실어줬다. 이후 선관위는 규칙 제정권, 국회의원의 선거법 및 정치자금법 위반 단속·조사·조치권, 정당 회계 감시권 같은 막강한 권한을 차례로 확보하며 권력 창출 과정을 관리하는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제어장치는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가 감사원이 공개한 채용비리다. 규칙 제정권을 남용해 세습 채용을 정당화했는데, 비난이 거세지자 국회의 통제와 감시를 논의하겠다는 실효성 없는 약속으로 덮었다. 선한 권력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불신은 점점 자란다. 감사원의 선관위 직무감찰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헌법재판소도 신뢰를 의심받는다. 법리적으로 수긍할 만한 결정인데 헌법재판관 상당수가 지역 선관위원장 출신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사법부 소속 법관이 선거 행정을 담당하는 선관위원을 겸직하는 관행은 삼권분립에 기초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관예우, 재판 지연 등 법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헌재였는데 갑자기 ‘현타’가 왔다. 10년 넘게 인권단체의 규탄 대상인 국가인권위원회, 검찰개혁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태어났지만 검찰보다 더 정치적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권력자의 사정정국 조성에 앞장서는 감사원, 특정 정치인의 정파적 권익 보호를 마다하지 않는 국민권익위원회…. 선의로 시작됐으나 거꾸로 갈등의 진원지가 된 정부기관 목록에 1987년 헌법 체제 중 민주화운동의 주요 성과라고 자부했던 헌재와 선관위의 이름마저 올라갔다.
이런데도 시간에 떠밀려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로 직행할 수는 없다. 의도가 선했든, 의도는 의심스러웠지만 반드시 필요했든, 모든 권력에 대한 제어장치가 마련되지 않고서는 어떤 공권력도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다. 결국 개헌이다. 하지만 대선 전 개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출마하는 모든 후보가 개헌에 대한 입장을 내놓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개헌 일정을 제시하고, 주요 쟁점에 대한 찬반을 구체적으로 표방토록 해야 한다. 차별성 없이 좋은 게 좋다는 두루뭉수리 경제·안보 공약은 필요없다.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자신이 제시한 일정과 의견을 토대로 개헌을 추진할지가 당선 기준으로 충분하다. 정치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못 한다면 시민사회가 나서 강제해야 한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