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천사의 음성을 듣는다. 그 머뭇거림 덕분에 가정을 지킬 수 있었고,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마태복음은 머뭇거리는 그를 ‘의로운 사람’(1:19)이라고 한다. 율법의 조항을 실행하는 일이라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직진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던 당시 유대교의 이해에 정면으로 맞서는 말이다.
우리는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이럴 때 확신에 찬 직진보다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 머뭇거림은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이다. 전모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의 윤리적 감각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은 겸손과 소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긴다. 지난해 12월 3일, 계엄의 밤에 국회를 장악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 중에는 주변을 서성이거나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들의 머뭇거림이 민주주의를 지켰고 무고한 피 흘림을 막았다.
사회 각 분야의 일이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인공지능(AI)으로 대체되고 있다. 군인들이 총 들고 하는 일도 로봇이 대체할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 멋진 일인가. 반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없이 총을 발사하고, 포탄을 투하하는 로봇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서 보자. 얼마나 섬찟한 일인가. 미래의 어느 날 밤, 또 어떤 권력자가 부하들에게 계엄을 명령한다고 하자. 명을 받은 AI 군인들은 한 치의 오차도,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사람을 만날 때 짧은 순간에 발생하는 ‘망설임의 간격(the interval of hesitation)’에 주목한다. 자신의 확신을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직관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때 잠시 멈춰 서서 머뭇거리는 간격이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그 근거를 돌아보게 되며 자신이 처한 상황과 눈앞의 상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망설이는 동안에 우리는 자기 생각을 상대화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머뭇거림은 기존의 생각, 특정한 문화나 이데올로기 안에서 프로그램화된 반응을 수정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말한다. 신과 만남, 혹은 신의 뜻을 따르는 삶도 이런 태도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베유는 주장한다.
그녀는 현대사회의 삶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에 속도를 대폭 늦추지 않으면 폭력과 충동적 행동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 했다. 그녀가 100년 전의 세계를 살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의 고민은 더 깊어진다. 그녀는 치열한 사색이 담긴 편지를 많이 남겼다. 영적인 경험과 사회적 도전을 내적으로 소화하려고 애쓰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 편지들은 그녀의 사상이 수많은 머뭇거림의 순간을 통해서 형성돼 갔음을 보여준다. 심중에 있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어 편지를 쓰고, 아침에 이걸 부칠까 말까 고민하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당장 카톡으로 보내고 받을 수 있는 이 편리한 시대가 앗아가 버린 사고의 깊이와 관계의 밀도가 아쉽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고 했다. 이 악한 세상을 당장 심판해야 마땅한 것 같은데 하나님도 머뭇거리시는 것처럼 보인다. 믿음은 한편으로 확신이지만 또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상대화하는 겸손이기도 하다. 겸손을 잃어버린 세대,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상대방을 정죄하기에 바쁜 오늘의 교회, 머뭇거림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기계와 비교돼야 하는 시대, 인간됨의 의미를 묻는다면 머뭇거림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
약력 △예일대 신학부(STM) △시카고대 인문학부(PhD) △미래목회와말씀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