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백남준은 1997년부터 한 해 전의 뇌졸중을 이겨내고 3년에 걸쳐 ‘사각형’ ‘원’ ‘삼각형’을 레이저를 사용해 완성했다. 각각 초록, 빨강, 파랑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한국 전통문화의 ‘원방각(圓方角)’에서 영감을 얻어 동양의 ‘천지인’ 사상을 형상화했다. 이때 그의 나이 67세. 생애 마지막 전시였던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에 나왔다.
16일 전시 종료를 앞두고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백남준 회고전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에 관객들이 몰리고 있다. 주중에는 1000여명, 주말에는 3000여명까지 전국에서 온 관객들로 북적거린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30일 개막 이후 3개월 반 동안 역대 최대인 13만 명이 다녀갈 것으로 미술관 측은 추산한다. 지난 6일 전시장을 찾았다.
인기 비결은 위에서 보듯이 초기부터 말기까지 백남준 예술 세계의 모든 것이 쏟아진 역대급 전시여서다. 행위예술의 뿌리인 해프닝과 자석TV, TV로봇, 인공위성 쇼, 대규모 비디오 설치와 레이저 작품에 이르기까지 총 160여 점이 나왔다. 전시를 공동기획한 백남준아트센터의 소장품 덕이 컸다. 작품 87점, 자료 37점, 비디오 15점 등 대량으로 작품을 대여해줬다. 작가 사후 이 같은 규모의 전시는 없었다.
작가 생존 당시인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 ‘비디오 때 비디오 땅’전이 이전까지 최대 규모를 자랑하지만 TV로봇을 조명하는데 그쳤다. 이번 전시는 백남준의 모든 것이 집결한 만큼 회고전 형식으로 꾸며 작품 세계의 변천사를 시간 순서대로 구성했다.
서울 종로에서 포목상을 하는 거부 집안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백남준은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를, 일본 가마쿠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던 시절, 그 한 대를 보유했던 부자 집안이었다. 백남준은 도쿄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쓴 뒤 현대음악을 공부하러 1956년 독일로 건너갔다. 하지만 플럭서스를 만나며 현대미술의 이단아로 성장한다.
전시는 29세였던 1961년의 퍼포먼스 비디오 ‘손과 얼굴’로 문을 연다. 이어 백남준 예술의 뿌리인 플럭서스 운동을 조명한다.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1962년 독일에서 조직한 플럭서스는 일상의 예술을 부르짖으며 음악과 미술, 무대예술과 문학 등 여러 장르를 융합한 예술개념을 주창했다.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오노 요코 등 거장들이 그와 영감을 주고받던 동지였다.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부수고, 입에 붓을 물어 글씨를 쓰고, 넥타이를 자르는 해프닝을 벌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당시의 혈기를 생생한 영상으로 보는 기쁨이 있다.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칭송을 받는 그가 TV수상기를 캔버스 삼듯 자석을 움직이며 왕관 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자석 TV’는 1963년 독일에서 가진 생애 첫 개인전과 이어 1965년 미국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선보였다. 텔레비전 12대에 12개의 달을 형상화한 65년의 대표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명상의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가장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는 역시 다양한 TV 로봇들이다.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일 작가 한스 하케와 함께 독일관 대표 작가로 초청받았을 때 ‘칭기즈칸의 복권’을 선보였다. 그런 작품을 비롯해 2001년에 제작한 4m짜리 압도적 크기의 TV로봇 ‘걸리버’가 눈길을 끈다.
8m 높이의 나무숲에 모니터가 매달린 ‘케이지의 숲-숲의 계시’는 1, 2층이 천장 없이 뻥 뚫린 공간 덕분에 이를 대여해준 울산시립미술관에서의 설치보다 스케일이 더 크다.
미술관 측은 백남준 생애 순서대로 작품을 배치했을 뿐 따로 내세운 키워드도 없다. 그럼에도 전시를 보다보면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통해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낙관했던 ‘시대의 천재 예술가‘ 백남준을 만날 수 있다.
부산=글·사진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