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그래서 지루할 거라는 통념을 깨고 자료만으로도 스토리를 전개하며 흥미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입증한다. 무엇보다 백남준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TV 로봇’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물 작품은 하나도 없다. TV 로봇의 사진 이미지를 프린트해 벽에 쭉 걸어 놓았을 뿐. 그럼에도 ‘로베르 피에르’ ‘장영실’ ‘콜럼버스’ 등 역사적 인물을 형상화한 TV 로봇을 제작할 당시 백남준의 필적이 담긴 스케치 등이 함께 전시돼 백남준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TV 로봇은 1990년대 집중적으로 탄생했다. 백남준은 1989년부터 약 10년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백남준 팩토리’에서 엔지니어 등 협업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TV 모니터를 사용해 인물 형상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탄생한 비디오 로봇, 비디오 조각은 무려 400여점.
이번 전시는 당시 그곳에서 작품 제작을 도왔던 수석 디자이너 겸 테크니션 마크 팻츠폴(76)의 소장품으로 꾸며졌다. 작품 제작에 쓰인 연구 스케치, 설치 도면, 사진을 오려 붙여 만든 목업, 사진, 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 300여점이 나왔다. 잔뜩 쌓인 TV수상기를 배경으로 찍은 멜빵 차림의 백남준의 얼굴에는 낙천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이 시기는 백남준의 예술 인생에서도 황금기였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일관 초대 작가로 나가 황금사자상을 받은 해도 1993년이었다.
전시의 또 다른 축은 판화 작품이다. 팻츠폴은 신시내티에 판화 공방 겸 화랑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백남준은 그와 함께 판화 제작을 했던 최고의 미술가였다. 그 시기에 제작한 판화 중 엄선된 20여점이 나왔다. 프랑스혁명의 영웅 당통, 로베스피에르, 페미니즘의 선구자 올랭프 드 구주 등 백남준의 TV 로봇을 판화가 팻츠폴의 솜씨로 찍은 판화 작업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4월 27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