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입력 2025-03-12 00:37

‘우리는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나라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름을 받고 응답한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한편에 새겨진 문구다. 1950년 미국의 아들딸 3만6000여명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한국, 누구인지도 모르는 한국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공원의 다른 한편에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새겨져 있다. 미국은 ‘남의 나라’ 한국의 자유를 위해 희생했다. 최근 워싱턴에서 만난 한국의 한 정치인은 미국에 대한 자신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국제개발처(USAID)라고 했다. 미국의 한국 원조 물품에 박혀 있던 ‘USAID’라는 명칭이 유년시절 기억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었다.

자유 세계의 방파제였던 미국은 지난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사라졌다. ‘위대한 미국’을 내세운 트럼프에게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이상은 각 나라가 형편껏 알아서 챙겨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외교의 절대 신조는 미국의 이익, 돈이다. 1941년 ‘대서양 헌장’ 발표 이후 자유 세계를 함께 지켜온 유럽은 그저 미국을 ‘뜯어먹는’ 나라들이고, 국경을 맞댄 캐나다도 관세로 제압해야 할 미국의 ‘51번째 주’다. 1918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세계 평화를 위한 14개항을 발표한 이후 전 세계의 ‘자유와 희망의 등대’를 자임해온 미국이 트럼프 취임 이후 너무나 갑자기 다른 나라가 됐다.

트럼프가 연출한 가장 참담하면서도 서글픈 외교는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불러 “감사할 줄 알라”며 윽박지르는 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전쟁 중이라 군복 차림을 유지해온 젤렌스키에게 “잘 차려입었다”고 빈정댔고, 백악관 출입 기자는 “정장이 없느냐”며 낄낄거렸다. 트럼프의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트럼프에게 전쟁 중이라 선거를 치르지 못한 젤렌스키는 ‘독재자’지만, 25년간 장기집권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신과 ‘사이가 좋은’ 정치인이다. 1950년 한국이 우크라이나와 같았다. 그때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 한국이 있다. 한국이 지금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것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성취지만, 미국이라는 좋은 친구의 지원도 큰 힘이 됐다. 현대사의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다툼에도 미국은 항상 한국의 동맹이었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에게 한국은 미국에 돈을 더 내야 하는 국가다. 대선 당시부터 한국을 ‘현금지급기’라고 부른 그는 최근 의회 연설에서 한국을 콕 찍어 겨냥했다. 한국이 미국보다 4배 높은 관세를 물리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했고,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약속도 휴지조각 취급했다.

상호관세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 트럼프가 멋대로 만든 청구서가 이제 속속 전달될 것이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만한 걱정거리는 아니다. 한국의 국력은 한국전쟁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는 2.8%로 높은 수준이고, 미군 방위비 분담금 면에서도 ‘우수한 나라’(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 후보자)다. 트럼프에게 간절한 조선업 협력에서도 한국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위에 있다. 트럼프의 미국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전쟁을 함께 치른 동맹인 미국이, 돈 되는 거래를 압박하며 오랜 우정에 금을 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지만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변한 느낌이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