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입력 2025-03-11 03:07

초등학생들의 수업 시간이었다. 교사가 물었다. “독일 가정의 하루 생활비가 5.5라이히스마르크인데 유전병 환자 한 명의 하루 생활비와 치료비가 12라이히스마르크라면 독일 국민이 잃은 가치는 얼마가 될까.” 한 학생이 질문으로 답했다. “이런 사람들을 돌보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들면 어떡해야 해요.” 그러자 또 다른 학생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야지.”

이 대사는 영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애슐리 이킨 감독, 2022)에 나오는 장면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시행된 나치의 ‘T4 작전’을 배경으로 한다. 나치는 장애인을 제거하는 ‘인종위생’ 정책을 펼치며 20만명을 안락사했다.

놀랍게도 교사는 오른손이 없는 장애인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 나치의 강요로 그 질문을 던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의 잠자리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가 주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을 비춘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장면을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나치는 왜 그토록 잔혹한 악행을 저질렀는가. 오늘날 벌어지는 전쟁과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정치적 혼란과 일부 교회의 불법 행위는 무엇 때문인가. 빈부 격차와 신분 차별은 왜 점점 심해지는가. 무엇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외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잃었기 때문 아닐까.

일용할 양식은 단순한 빵 한 조각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주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는 내일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에 충실하라는 뜻이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살았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그들은 미래를 두려워하며 무한히 축적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이 기도의 의미를 잊어버렸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가르침이 퍼져 나갔다. 이후 부유해진 교회와 신자들에게 이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되고 말았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세상도 마찬가지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간극이 깊어지면서 결국 누군가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더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경쟁이 강화되고 그 속에서 약한 자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그래서 걱정이다. 나치의 ‘T4 작전’은 장애인 학살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단계는 유대인 600만명을 포함한 대규모 인종청소였다. 인간을 가치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제거의 대상은 끝없이 확대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념과 경제 논리에 따라 누군가는 배제되고 사회는 점점 더 비정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러한 흐름은 국가 간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전쟁이 반복되고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가 돼가고 있다. 그 안에서 약소국과 힘없는 사람들은 희생된다. 한 국가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누군가는 쫓겨나고 고통을 겪고 있다. 국제사회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강화하며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묻히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여전히 유효한가.

나는 오늘 하루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다. 더 가지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누고 돕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더 많은 나눔과 신뢰다. 하나님께서 오늘 허락하신 양식에 감사하며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풍요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다.

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
<약력>△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ThM)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MA) △풀러신학대학원(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