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국제 사회 기존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미국은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외치며 다자간 기구 탈퇴는 물론 관세 정책을 앞세워 동맹국 때리기도 서슴지 않는다. 트럼프의 이 같은 일방적 행보에 주변국들은 서서히 지쳐가며 각자도생을 모색하는 분위기다.
반면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에 대한 대외 관계를 강화하는 등 미국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올해 외교 예산을 국방이나 공공안전(치안) 등 다른 분야보다 더 큰 비율로 늘렸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의 해외 원조를 담당하던 국제개발처(USAID)를 폐지하기로 하는 등 국제무대에서의 패권 유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이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미국 빠진 자리 노리는 중국
캄보디아지뢰행동센터(CMAC)는 지난 1월 말 중국이 올해 3월부터 1년간 44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당일인 지난 1월 20일 국외 개발 원조 일시 중지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 이로 인해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각종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CMAC가 하는 지뢰 제거 사업도 그중 하나였다. CMAC의 중국 원조 발표는 미국에서의 돈줄이 끊기고 바로 일주일 뒤에 이뤄졌다. 미국은 중국의 지원 소식이 알려진 뒤에야 “대외 원조 정책을 검토하는 동안 자금 지원을 재개하겠다”고 CMAC에 연락했다.
캄보디아에서 중국이 보인 즉각적인 대응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은 미국 견제를 위해 글로벌 사우스라는 이름 아래 해당 국가와의 상호 연관성을 높여가고 있는데, 캄보디아 원조도 이러한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남반구 또는 북반구 저위도에 있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을 통칭하는 용어다. 중동, 인도, 멕시코, 캄보디아 등 120여개 국가로 구성된다. 그중에서도 인도, 인도네시아 등은 높은 인구 증가율 및 경제 성장률로 새로운 소비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핵심 자원도 많아 차기 생산 거점으로 거론된다.
유럽연합(UN)에 따르면 글로벌 사우스는 세계 인구의 85%,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의 65%를 차지한다. 주요 기관들은 세계 15대 경제 대국에 포함되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가 현 3개국(인도 브라질 멕시코)에서 2050년 7개국(인도네시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나이지리아 추가)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중동·아프리카에 공들이는 중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의 일원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자신들 주도로 만든 브릭스(BRICS)에 좀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 시기 미국이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을 추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난해부터 중국이 개도국이자 글로벌 사우스의 일원임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브릭스를 통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포섭하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 인도네시아가 올해 초 브릭스에 가입했다. 중국은 최근엔 미국으로부터 25% 관세부과 날벼락을 맞은 멕시코에 손을 내밀기도 했다.
국제금융센터는 최근 ‘트럼프 2기, 글로벌 사우스 부각 가능성과 영향’ 보고서에서 중국이 향후 글로벌 사우스에서의 결속력을 높여 기존 아시아뿐 아니라 중동, 브릭스를 아우르는 얇고 넓은 ‘빅 텐트’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사우스에서의 영향력 확대가 중국이 현재 추진 중인 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중국은 원유 수요 충족과 ‘일대일로 사업’ 확장 등을 위해 중동 진출이 필수적인데, 지금의 상황이 중국에 나쁘지 않다는 얘기였다. 석유사업 의존도를 줄이려는 중동 입장에서도 중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고 센터는 설명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는 향후 미·중 대립의 핵심인 첨단 원자재 공급처로서 중요성이 큰 지역이다. 중국은 2010년부터 3년마다 아프리카 정상들을 초청해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누적 직접투자액은 352억 달러나 된다. 미국은 10억 달러에 불과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당시 아프리카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으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0차례 방문했다. 센터는 “트럼프 2기 동안 미국의 지정학적 영향력은 이어지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경제력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국제 질서가 더욱 다극화될 소지가 있다”고 전망했다.
중국 외교 예산 8.4% 늘어
알렉스 영거 전 영국 해외정보국 국장은 최근 영국 BBC 방송에 출연해 “우리는 국제관계가 규칙과 다자간 제도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강력한 인물과 거래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여기서 언급된 강력한 인물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더욱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백악관으로 돌아온 그는 국제 관계 및 시장에서 미국이 가지는 강력한 지위를 이용해 주변국을 코너로 내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중국의 글로벌 사우스 진출을 가속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올해 외교 예산을 지난해보다 8.4% 늘어난 645억600위안으로 책정했다. 지난해 증가율 6.6%보다 1.8% 포인트 늘었다. 이를 두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 중국의 우군을 더 늘리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