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부활절,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로부터 140년이 흘렀다. 복음의 작은 씨앗이 심겼던 한국교회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세계에서도 괄목할만한 ‘복음의 거목’으로 자랐다. 국민일보는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며 ‘복음, 땅끝에서 피어나다’라는 제목의 기획을 마련했다. 1부 ‘이 땅에서 자란 복음의 열매’에서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 남긴 교회 학교 병원 등 선교의 여러 흔적을 소개한다. 2부 ‘복음 들고 땅끝으로’를 통해서는 해외 각지에서 묵묵히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을 찾아가 이들의 사역을 집중 조명한다. 3부 ‘이제는 통합이다’에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호주와 캐나다교회들의 교단 연합 사례 등을 통해 한국교회 화합의 길을 모색한다.
우리나라엔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을까.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전국에 8만3883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교인은 967만5761명으로 전체 인구의 19.73%를 차지한다. 한국리서치 2023년 종교인구 비율 조사를 보면 개신교가 20%로 1위, 불교가 17%로 2위, 천주교가 11%로 3위, 종교 없음은 51% 수준이다.
1885년 부활주일에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이후 140년 만에 이룬 복음의 결실이다. 한국교회의 괄목할만한 성장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사실 세계 선교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부흥의 사례다.
미국 고든콘웰신학교 산하 세계기독교연구센터가 2022년 펴낸 ‘글로벌 크리스채너티’에 실린 각국 교세 현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식민지배를 받을 때 네덜란드개혁교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했던 대만은 19세기 말이 돼서야 교회가 늘기 시작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교세가 확장됐지만, 결과는 판이하다.
2020년 기준 대만 기독교인은 가톨릭을 포함해도 전체 인구 중 6.1% 수준에 그쳤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선교사들도 상당수 활동하고 있는 태국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초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태국의 기독교인은 여전히 1.3% 정도일 뿐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불교의 벽에 갇혀 있다.
주변국 선교역사와 비교하면 이 땅에서 자란 복음의 열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선교사의 첫 내한 이후 수많은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다. 이들은 교회 개척을 필두로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신문물을 선사했다.
세포망처럼 퍼져 있던 교회 네트워크는 1919년 3·1운동의 성공도 견인했다. 당시 천도교는 만세운동을 위한 자금 대부분을 댔고 교회는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체포된 이들 중 기독교인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다.
선교 초기부터 교회가 빠르게 성장한 데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복음을 향한 독특한 열정’도 한몫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장식한 특별한 기록들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선교사 입국 전인 1882년에 이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라는 쪽복음이 한글로 번역돼 있었다. 첫 교회가 설립된 것도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이다. 황해도 장연군에 있던 소래교회가 주인공이다.
설립연도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885년 이전 설립됐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데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 교회로 꼽힌다. 분단으로 교회의 원형을 지킬 수 없었지만, 한국 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선교사들의 손끝을 거쳐 세워진 교회는 정동제일교회와 새문안교회로 각각 최초로 조직화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다. 이들 교회는 전국 8만여개 교회 가운데서도 ‘어머니 교회’로 불린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터를 닦은 직후 세웠다. 개화파 인사들이 상당수 모였던 이 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여성을 가르치던 이화학당 사이에 있었고, 교사와 학생들 다수가 출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현순, 손정도 목사를 비롯해 민족대표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 등이 교회에서 활동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새문안교회를 조직했다. 우리나라에서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데 초석이 된 새문안교회는 정동제일교회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의 요람과도 같은 공동체였다. 새문안교회에는 안창호를 비롯해 김규식 등의 독립운동가가 민족 해방의 꿈을 키웠다.
교회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이후 역사는 창대하다. 불교와 같은 전통적 다수 종교를 크게 앞지르며 국내 최대 교세를 갖춘 종교로 성장한 건 분명한 축복이다.
하지만 성장세는 계속 이어지지 못한 채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90년대 이후 정체기를 거쳐 현재는 빠르게 교인이 줄고 있다. 젊은 세대는 빠르게 교회를 등지고 있으며 50대 이상 교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교회에서 활력을 찾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국 선교사들 모두 문화와 종교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선교와 전도 대상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말했던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을 인용한 이 교수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어떤 그릇에 복음을 담아 전할 것인지 고민해야 다시 사랑받는 종교가 될 수 있다”면서 “140년 전 이 땅의 선교사들이 전했던 그 문화의 틀을 고수해선 재도약의 기회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