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신앙으로 하나 됨에 감사했던 시기에 나는 또 다른 시련 앞에 서게 됐다. 두 번이나 입대를 연기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당시 군 복무 기간은 36개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있을 생각에 가슴 한편이 먹먹했다.
1973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나는 친구들과의 파티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와 밤거리를 걸어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을 지났다. ‘언제 다시 이곳을 걸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발길이 자꾸 머뭇거렸다. 수많은 생각과 근심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시 동대문 근처에 있던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발걸음은 유독 무거웠다. 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연무대행 야간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신체검사 때 받은 병과는 헌병. 당시 군 생활이 다들 어려웠겠지만 대학 선배들이 “헌병은 정말 힘들다”며 겁을 잔뜩 준 터라 막막했다. 어두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들을 보며 “군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훈련소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한밤중 비상 집합이 걸려 팬티 바람으로 뛰어나가는 건 다반사였다. 영하 날씨에 찬물을 뿌리는 얼차려도 받았는데 물이 몸에 닿을 때마다 칼로 베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충남 논산에서 6주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야간열차를 타고 경기도 성남의 헌병학교로 갔다. 새벽 1시경 도착했는데 조교들이 헌병 329기인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눈 쌓인 산꼭대기에 있는 24동 막사로 선착순 10명.” 후반기 교육은 얼차려로 시작됐다.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등수에 들었더니 “전쟁이 나면 전우들 버리고 도망갈 놈들”이라며 몽둥이찜질을 받았다. 8주간의 후반기 교육 중에는 면회도 힘들었다. 면회를 다녀오면 “사회 기름기가 끼었다”며 연병장 20바퀴를 돌아야 했다. 그래서 누군가 면회 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어머니가 한 번 다녀가셨는데 짧은 시간 밖에서 식사한 게 전부였다.
후반기 교육이 끝나고 자대 발표 날이 왔다. 120명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교도소로 가게 된 동기들은 3년 가까운 시간을 수감자들과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통곡했다. 수감자들이 빨래도 해주고 편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곳엔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같은 성씨를 가진 동기와 함께 경기도 용인에 있는 3군 사령관의 사택으로 배치받았다.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근무지였기에 동기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출발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날벼락이 떨어졌다. ‘빽’에 밀려 이동 도중 근무지가 변경되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힘들다고 하는 용인의 헌병대대로. 말 그대로 잠시 천당에 있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각오한 것보다도 자대 적응은 더 쉽지 않았다. 저녁마다 들리는 구타와 얼차려 소리에 나와 동기는 벌벌 떨어야만 했다. 유일한 탈출구는 주일에 허락된 교회 외출이었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정리=이현성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