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3월이면 갑작스레 부지런을 떨어 겨울 외투들을 세탁소에 맡겼다. 어떤 봄에는 세탁물을 찾지 못해 입고 나갈 외투가 없었고, 어떤 봄은 세탁돼 고이 모셔둔 외투를 다시 꺼내 입기도 했다. 이제 나는 3월을 믿지 않아 그런 유의 부지런을 삼간다. 이전의 실수들을 바탕으로 조금 더 현명해졌다고 안도한다. 봄의 낌새를 느낀 지가 언젠가 아직까지 바깥은 춥다. 봄은 오기가 싫은 걸까. 오고 싶은데 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 길가에 심어진 헐벗은 나무 한 그루라도 된 듯한 마음으로 봄을 애타게 기다리고만 있다. 봄은 저만치 당도한 채로도 겨울을 멀찌감치에서 에워싸며 겨울이 스스로 완전히 물러나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듯하다. 단칼에 여름에 종지부를 찍듯 등장하는 가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기다려줄 줄 아는 봄의 미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유독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때가 되면 와줄 것을 안다는 것으로 인해 기다림은 가능해지므로, 기다림은 믿음이라는 말과 그 뜻이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안다는 것과 기다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옆옆에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것들이다.
뮤지션 시와의 ‘봄을 만든다’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은 오늘, 옆옆에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저 말들의 선두에 ‘용기’라는 걸 놓아두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겨울을 보낸다 많은 일이 있었다”로 시작하다가 문득 “용기”라는 단어가 돌부리처럼 돋아나오는 노래. 시와는 ‘봄을 기다린다’고 하지 않고 ‘봄을 만든다’라고 다르게 말했다. 봄에 대해서라면, 기다린다는 말보다 만든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 겨울이 점점 더 혹독해지고 길어지게 될 다음 봄에는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이 노래가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만든다’는 것은 작동시키는 의지. 기다림도 의지의 태도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의지로 용기가 보태질 때에 우리는 가까스로 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