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무례가 당당해질 때

입력 2025-03-08 00:38 수정 2025-03-08 13:44

3·1절이었던 지난 토요일 오전 습관처럼 열어 본 뉴스 채널엔 온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백악관 회동 이야기가 가득했다. 러·우 전쟁 종전이 걸린 데다 취임 이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관심이 쏠린 건 당연한 것이지만 그 정도와 내용은 남달랐다. 국가 정상끼리 만나 상대를 주저 없이 비방하고 몰아세우는 모습은 그 장면 속 주인공들뿐 아니라 바라보는 이들을 여러 의미에서 흥분시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미국이 러시아 편을 들고 자국 이익을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겠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따른 국제정세 차원에서의 충격만은 아니었다.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 미칠 영향 등을 놓고 많은 분석과 비평이 이어졌지만 화제는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보인 태도 그 자체였다.

실시간으로 전파를 탄 그날의 영상은 수많은 버전으로 길고 짧게 나뉘어 공유됐다. 초강대국 미국의 트럼프와 동맹국이었으나 긴 전쟁 끝에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듯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가 정면충돌하고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난 소식은 수많은 생명이 담보된 정전협정 논의의 중요성 같은 걸 잊게 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즐길거리 콘텐츠가 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식사 자리엔 아이들도 유튜브와 SNS에서 관련 소식을 접했는지 한 마디씩 얹었다. 대체로는 너무 황당해 웃긴다는 키득거림이었다.

함께 웃어지진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 우방국들 등 여러 역학관계 문제는 뒤로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더구나 리더가 리더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한 기준치를 무너뜨린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남녀노소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지는 자리에서 세계 최정상 리더가 상대국 정상을 너무나 당당히 무례하게 대했다. 더 우려스러운 건 그 무례의 이유가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는 점이다. 젤렌스키에게 “무례하다”며 화내던 트럼프는 “당신은 감사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안 그래도 유튜브와 각종 익명 기반 채널을 통해 폭력적 막말과 행동을 보는 게 일상인 시대에 권위 있는 이들이 당당히 펼치는 무례함은 ‘힘 있으면 막 나가도 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당장 이번 회담을 놓고도 젤렌스키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식의 조롱 섞인 반응, 힘의 논리가 당연하다는 식의 언급이 공공연히 나왔다. 그것이 쿨한 분석인 것처럼.

눈 앞에 있는 상대와 대화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도 예의가 무시되는데, 논쟁하거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열린 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3·1절 광화문광장 앞에서도 무례는 판쳤다. 대중 앞에 나선 국회의원이 ‘헌법재판소도 때려 부숴야 한다’는 위험천만한 선동의 말을 하는 것도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무례의 바탕엔 ‘내가 맞다’는 오만함과 ‘상대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가 깔려 있다.

문제는 자극적이고 극단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무례함에 대한 문제 의식과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례함엔 폭력성이 내재돼 있다. 그런 무례가 당연해질 때 누구나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공동체를 이뤄 협력하는 문명사회로 나아온 과정은 인간의 존엄성이 차별 없이 지켜질 수 있게 몸부림쳐 온 역사다. 이를 위해 갈고 닦아온 상호 존중의 태도와 예의를 벗어던지는 건 역사 퇴보인 셈이다. 성경은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고 경고하며 끊임없이 친절과 경청의 중요성을 얘기한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 4:3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고 13:5)하라고.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