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한없이 가벼워진 요즘 집회와 시위

입력 2025-03-07 00:39

민주주의 꽃피운 집회와 시위
정략이나 돈벌이에 악용되고
너무 남발되면서 의미도 퇴색

탄핵 둘러싼 여야 편가르기와
폭력 조장, 독설·궤변도 난무
법 개정해 '민주 자산'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이룬 민주주의에서 집회와 시위를 떼놓을 수 없다. 멀게는 4·19혁명부터 6·3항쟁, 박정희 유신정권 때의 반독재·반유신 시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87년 6월항쟁, 2016년 국정농단 규탄 촛불시위 등 중요한 시대적 변곡점마다 광장과 거리에서 숭고한 외침이 있었다. 거리로 나가는 것 자체가 큰 용기였고, 5·18 학살과 이한열·강경대·김귀정 열사처럼 시위 도중 목숨을 잃거나 회복되지 않는 상흔을 가진 이들도 많다. 집회·시위에서 터져나온 울부짖음과 희생이 쌓여 지금의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그랬던 집회·시위 현장이 지금 어떤 모습인가. 요즘 광화문에선 주말만 되면 전광훈씨가 주축이 된 대규모 탄핵 반대 집회가 개최된다. 거의 연중 내내 열린다. 숱한 시민과 관광객이 오가는 광화문 일대 번화가를 마치 전세 얻은 양 차지하고 있다. 그 집회에선 헌금을 걷기도 하고, ‘당신의 유심(USIM)이 애국심’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알뜰폰 판촉 활동도 벌어진다.

금싸라기 땅을 매주 차지하고, ‘광장 비즈니스’도 가능한 것은 구멍 많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덕이다. 집회는 30일 전부터 관할 경찰서에 선착순으로 신청할 수 있다. 허가가 아닌 신고제여서 신청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얼마 전 JTBC가 찍은 영상에선 전씨 측 사람들이 서울 종로경찰서 민원실 맨앞에 서서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집회 신청 ‘오픈런’을 하기 위해서였다. 화장실도 다녀와야 해서 2명이 교대로 지키고, 경찰서 앞에 텐트를 설치해 한 명은 그곳에서 대기하다 바꿔주곤 한다. 공공장소를 자기 앞마당처럼 써온 비결이다.

지난주 토요일 광화문 주변에선 대규모 탄핵 찬성 집회도 열렸다. 진보 단체들이 연합해 종로 안국역 인근에서 탄핵 촉구 집회를 열었고, 또 다른 근방에선 야5당이 ‘윤석열 파면 촉구 대회’를 개최했다. 보수 쪽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진보 단체나 야당의 장외 집회도 부쩍 늘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장외 진출이 빈번해졌다. 이명박·박근혜정부 때만 해도 제1야당이 주도하는 장외투쟁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국회에서 할 만큼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그때서야 장외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런 고민 끝에 장외로 나섰을 때 정치적 파괴력이 컸고, 응원하는 국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의석 170석을 가진 민주당이 수시로 장외로 나서는 것에 감흥을 느끼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무엇보다 전국 곳곳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참석하는 탄핵 반대 집회와 함께 여야 제도권 정당들이 앞장서는 이런 식의 장외 세 대결은 국민을 점점 더 편 가르기만 할 뿐이다. 그런 집회 무대에서 나오는 독설과 궤변은 듣기 민망할 정도다.

양 극단 세력이나 정치적 집회만 늘어난 게 아니다. 평소 노동단체나 대기업 노조, 각종 직역단체의 집회와 시위도 너무 잦아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냥 흘러가는 행사로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지금은 집회나 시위를 해서 국민한테 얻는 지지보다, 성가실 정도로 너무 많아 오히려 점수를 까먹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집회와 시위가 한없이 가벼워지고 주목도 받지 못하는 시대다. 집회·시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보다는 특정인 또는 특정 세력이나 조직의 이익과 정략을 위해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서일 것이다. 또 걸핏하면 뛰쳐나가면서 집회·시위가 갖고 있던 장외 호소 수단으로서의 상징성도 많이 퇴색했다. 하지만 소중한 민주적 자산인 집회와 시위를 이런 식으로 소진해선 안 된다. 훗날 더 중요한 때를 위해 그 상징 가치를 지켜야 한다. 집회·시위가 가진 의미가 더 찌그러들지 않게 하려면 집시법 개정을 통해 집회·시위가 악용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폭력과 폭동을 조장한 전력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의 집회 신청도 제한해야 한다. 영리 활동과 같은 신청 취지에 어긋나는 게 없는지 사후 검증도 강화해 페널티도 줘야 한다.

무엇보다 보수·진보 단체들과 여야, 노동계, 직역단체 모두 집회·시위를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같이 시도 때도 없이 집회·시위를 하다간 정작 늑대가 나타났을 때 마을 사람들한테 외면 받는 양치기 소년 꼴이 되기 십상이다. 집회·시위는 우리 모두가 그 가치를 온전히 지키고 꼭 필요한 때에 의지해야 효과도 크고, 의도한 목적도 이룰 수 있다. 지금같이 마구 탕진할 소모품이 결코 아니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