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말을 건네서는 안 됩니다

입력 2025-03-07 00:32

대화 자체 봉쇄한 입시 학원
존재성 부인한 사회적 학대
MZ, 타인과 함께 살아가길

딸아이가 대학 입시를 재수하게 됐다. 지난 한 해 수능 기출 문제와 모의 문제 풀이를 무한 반복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던 터라 그 지루한 과정을 어찌 다시 해낼지 매우 안쓰러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은 재수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몇 주 일찍 재수를 결정한 자녀를 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나도 아이가 혼자 공부하기보다 학원에 다녔으면 좋겠어. 친구라도 사귀고 함께 공부하면 좀 낫지 않을까?” 이런 내 말에 선배는 웃으며 답했다. “친구? 학원에서 애들은 절대 다른 애들한테 말 걸면 안 돼. 아예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돼 있어.”

단순히 타인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도록 교실 내 대화를 한정적으로 제한시킨 것이 아니라, 아예 학원 전체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도록 한 조치라고 했다. 친구를 사귄다는 핑계로 연애로 빠질 위험이 있을뿐더러 결국에는 대입 시험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오히려 심리적 어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완전히 새로운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것은 말을 주고받으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을 실현해 가는 인간의 보편적 존재 방식이 강제적으로 중단된다는 근원적 공포였다.

그제야 지난 몇 년간 신입생 지도교수로서 만났던 학생들이 떠올랐다. 개별 상담을 통해 만났던 그들 상당수가 재수 혹은 삼수생이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긴 인생에 있어 1~2년 늦게 가는 것이 실제로 꼭 느린 것이 아니라고, 수험생활을 고생하며 배운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 지지해 줬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겪었던 고생의 본질은 단순히 육체적이거나 심리적, 나아가 경제적 고생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관계적 존재인 인간의 존재성을 중단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까지 철저하게 봉쇄시켜버린 사회적 학대였다.

인간은 낯선 타인에게 말을 걸어 서로 친숙해지고 마음에 맞는 대화를 지속하면서, 또한 불편한 대화까지 감내하면서 사람들을 사귀어 나간다. 이제 막 입이 트인 두세 살 아이부터 요양원 노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사귀어 나간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귀며 자칫 자기 안에 갇힌 독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의하면, 인간이 이미 ‘말해진 것’(le dit)을 우선적으로 배우고 반복하며 타인에 대한 이해를 얻는다. 그러나 어떤 별 볼 일 없는 인간도 이미 말해진 것들에 다 담길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미안하지만 그러한 확신은 철학자에게 ‘동일성 혹은 전체성의 폭력’이라 불릴 것이다. 다행히도 레비나스는 우리가 인간은 타인에게 말을 거는 행위, 즉 ‘말함’(le dire)를 통해 이미 ‘말해진 것’들로 규정되지 않는 타인에게 다가설 수 있으며 나의 편협한 확신 너머로 나와 전혀 다른 타자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쳤다.

대한민국 입시생들은 오늘도 이미 ‘말해진 것들’의 기출 문제를 하나라도 놓칠까봐 수백 번 반복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말함’을 금지당한 고독의 시간, 아니 타자와 더불어 자기를 초월할 기회를 금지당한 학대의 시간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성세대는 MZ세대가 너무 개인적이고 사회적 갈등을 견뎌내지 못한다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 사회적 성취를 많이 얻은 MZ세대일수록 ‘말함’의 복을 박탈당한 경험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늦은 밤 학원에서 돌아온 지친 아이를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하찮은,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방법일 뿐이다.

레비나스가 볼 때 자녀에게 부모란 완전한 타인이면서 여전히 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함’에는 새로울 게 많지 않은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내 안의 욕망과 사회에 대한 분노가 뒤엉켜 갈 길을 모르는 밤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