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사교육, 한국의 알려진 리스크

입력 2025-03-08 00:38

‘알려진 리스크(위험 요소)는 리스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자산시장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일종의 격언이다. 리스크 요인임을 모두 알고 있다면 전략을 세워 대응하게 돼 결과적으로 리스크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지난해 부동산 경기 침체로 부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이 늘어날 때도 등장했다. 건설사들이 연쇄 도산하며 한국 경제를 흔들 수 있다는 ‘4월 위기설’이 제기됐지만 다행히 현실화하지 않았다. 해당 격언이 유효함을 입증한 사례다.

코미디언 이수지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페이크다큐 ‘휴먼다큐 자식이 좋다’가 인기다. 영상에서 이수지는 서울 대치동에서 4살 자녀 ‘제이미’를 학원에 ‘라이딩’(등하원 지원) 하는 35살 이소담 역할을 연기했다. 이를 놓고 ‘대치맘(대치동 엄마)’에 대한 조롱이냐, 풍자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과도한 사교육에 우리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대치동을 경험하지 못한 나조차 그렇다. 그러니까 4살인 제이미가 학원을, 그것도 여러 개를 다닌다고?

그렇다고 한다. 과거 초중고 학생에 집중됐던 사교육 영역이 0~6세 영유아까지 확대된 지 오래다. 유명한 영어학원에 다니기 위해서는 레벨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단다. 유명 학원 입학을 위한 시험을 ‘4세 고시’ ‘7세 고시’라고 부른다. 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 시장이 또 형성돼 있다. 4살 영어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레벨테스트를 준비하기 위한 선행학습은 도대체 몇 살 때부터 시작되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나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 대부분이 사교육 광풍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강남 3구를 중심으로 한 집값 상승부터 노후 빈곤, 내수 침체, 출산율 저하 등의 원인을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빼놓고 설명하라고 하면 불가능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7조원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현대차·기아가 벌어들인 돈과 같다.

대치맘이 아니더라도 가계 월소득의 30~50%를 자녀 사교육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4살 때부터 영어학원에 보내 고등학생 때까지 16년 동안 소득의 절반을 사교육에 쓴다면 퇴직 후 노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40%대에 그친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5명을 기록했다. 막대한 사교육비가 부담스러워서 결혼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이들이 많다. 한 명만 낳아 제대로 지원하고 키우겠다는 이유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막대한 사교육비가 있다.

과도한 사교육비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포털에 검색해보니 1991년 사교육비가 공교육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영유아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1994년 1월 26일 연합뉴스 ‘학부모연대, 유아 대상 과외교육 반대 건의’라는 기사를 보면 전풍자 학부모연대 대표가 “유치원비와 과외비를 합치면 대학생보다 유아 교육비가 더 든다”면서 유아교육을 전면 공교육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있다.

30년 전에도 과도한 사교육이 문제였다. 사교육은 우리 사회가 모두 알고 있는 리스크였던 거다. 알려진 리스크는 리스크가 아니라고 했는데 어째서 우리는 인구 소멸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걱정까지 받게 된 신세가 된 걸까. 한국 사회는 제대로 된 제도 개선과 대책을 내놓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어떤 방식이 됐든 과도한 사교육비를 줄이는 방향의 정부 개입이 있어야 한다. 공부가 꼭 사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후진국적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향 평준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30년 넘게 문제의식만 느낄 게 아니라 전략을 세워 대응하자는 것이다. 자녀 교육에 ‘올인’한 나라에서 정작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시장을 먼저 개척한 ‘퍼스트 무버’ 사례는 없었다. 현대차·기아 1년 영업이익을 투자한 결과가 이거라면 이제는 고민해볼 때가 됐다.

제이미맘 이소담이 사교육에 쓰는 돈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통계청에서는 영유아 사교육비 관련 통계를 집계해 발표하지 않는다. 정책 설계의 기반이 될 통계가 없으니 당분간 대책이 발표될 일은 없을 것이다. 수조원대가 되리라 추정만 할 뿐이다. 알려진 리스크를 언제까지 묵묵히 안고 살아야 할지 아득해진다.


이광수 경제부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