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꽃들은 어디로 갔나?”

입력 2025-03-07 00:30

얼마 전 한 배우의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한때 촉망받던 그녀는 한순간 과오로 모든 것을 잃었다. 잘못은 명백했고, 책임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갈 곳 없는 그녀를 한 인간으로 바라봐주려 했던가. 우리 사회는 실패한 사람을 끝까지 정죄하면서도 정작 그 속에 깃든 영혼의 아픔은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젊은 날을 차르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요청한다. “형제들이여, 인간의 죄를 두려워 말라. 죄악에 물든 사람일지라도 그를 사랑하라.” 하물며 그녀는 실수를 한 번 저질렀을 뿐이다. 그 일이 존재 전체를 부인하고 평생 동안 단죄받아야 할 이유가 될까.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이 결정돼야 한다면 이 세상에 회복을 위한 자리가 단 한 평이라도 남아 있을까.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 강제동원된 북한군 병사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그들은 20대 초반이었고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터로 내몰렸다. 10년 넘도록 만나지 못한 가족조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차가운 죽음을 맞았다. 한 포로 병사는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오열했다.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김새론 배우와 북한군 병사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공통된 현실을 마주했다. 한 사람은 한순간의 실수로 단죄받았고, 또 다른 이들은 선택의 기회조차 없이 희생됐다. 두 사례의 맥락은 다르지만 실패한 개인과 희생된 청년을 대하는 방식이 놀랍도록 닮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외면하며, 너무 쉽게 잊는다.

브라더스 포가 부른 노래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는 한 시대의 상실을 그려냈다. 소녀들의 손에서 꽃을 받아 든 젊은이들은 군인이 돼 전장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무덤으로, 다시 피어나는 꽃으로…. 여전히 우리는 악순환을 반복하며 회귀하고 있는 것만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외친다. “어린아이들을 사랑하라. 그들은 천사와 같이 순진무구하며,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아이였던 이들을 우리는 지켜내야 하지 않았을까. 김새론 배우를 단죄하고 북한군 병사들을 외면하는 이 땅의 모습, 결국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고난과 상처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성찰하는 시기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고민하며 기도하셨을 때 제자들은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오늘날 우리 사회도 여전히 무고한 사람들의 아픔 앞에서 잠들어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젊은 영혼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들을 보호하고, 가능성을 존중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대문호의 말처럼 “결국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우리를 온전히 인간답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물어야 한다. 스러진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면 이제 단죄가 아닌 회복을, 외면이 아닌 돌봄을 선택해야 한다. 김새론 배우와 북한군 병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 단순한 감상으로 끝나선 안 된다. 우리는 정말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인가. 이 질문을 가슴에 새길 때다.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스러진 꽃들은 영영 무덤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그때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창 37:26~28)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