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4대학 졸업’ ‘베를린대학 예술학부 교수’ ‘피렌체 미술관 전속 작가’ ‘파리 제7대학 예술학부 교수와 명예교수’….
이처럼 화려한 허위 이력으로 세계적 조각가 이미지를 팔아온 사기 전과자 최모씨에게 전국의 성당은 물론 신안·청도군 등 지방자치단체까지 억대~수십억대 공공조형물을 맡기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개별 성당이야 그렇다 쳐도 지자체는 행정시스템이 작동해야 하는데 말이다. 주민 혈세가 낭비되는 일이라 비극적 코미디의 원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청도군의 경우 최씨가 조각품 기증 의사를 밝히며 눈물의 사연으로 군수에게 접근한 것과 달리 신안군은 군수가 먼저 최씨에게 제작을 의뢰했다는 점에서 황당하다. 대구지방법원이 최근 청도군이 최씨를 상대로 제기한 사기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신안군이 제기한 소송에는 무죄를 선고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테다.
신안군의 속은 꺼멓게 타들어갈 것 같다. 신안군을 취재해보니 속된 말로 “뭐에 씌인 경우”라고 변명할 수 있을 거 같다. 사연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업무협의차 직원들과 영월군을 방문했다. ‘박물관 특구’로 지정된 영월군의 추천으로 최씨가 운영하는 ‘영월종교미술박물관’을 둘러보다 전시된 천사상을 보게 된 박 군수는 반색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를 평화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던 군수의 눈에 ‘평화=천사’ 이미지가 쏙 들어왔을 것이다. 천사상 제작은 박 군수가 다음 지방선거에서 떨어지면서 유야무야됐다가 2018년 재당선되며 가속도가 붙었다. 마침내 2019년 하의도에 천사상미술관이 개관했다. 선착장부터 섬 곳곳에 하얀 대리석의 미소 지은 천사상 318점이 들어섰다. 투입된 세금은 19억원에 달했다.
검증 시스템은 없었을까. 신안군에 따르면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니 위조된 이력이 흘러 다녔다. 영월군에서는 사람마다 그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6·25전쟁 때 고아가 돼 이탈리아 유명 화가의 양아들로 입양됐다”는 눈물겨운 스토리, 혼혈의 외모도 그럴싸한 신뢰감을 줬던 것 같다.
최씨는 10대 초반부터 철공소, 목공소에서 일했는데, 그것이 ‘세계적 조각가’로 통하는 밑천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작품 수준은? 흰 대리석으로 빚은 미소 짓는 천사상은 대중의 눈에는 천사를 잘 조각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닮게 그리고 조각하는 미술의 가치는 19세기 후반 카메라가 출현한 뒤 가치를 잃었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난해하다. 그럼에도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은 있다.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다.
이번 사태의 이면에는 전문가를 중시하지 않는 한국의 풍토가 있다. 박 군수는 섬이 많은 신안을 일본의 나오시마 같은 예술의 섬으로 키우고자 했다. 그럼에도 당시 군에는 미술 전문인력은 없었다. 전문가는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지만 동시에 전문가만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들어온다. 인터넷에 떠도는 허위 이력은 전문가 직원의 네트워크를 통해 걸러지면서 최씨가 미술계에서는 ‘듣보잡’이라는 사실이 금방 밝혀졌을 거라 생각한다.
동시에 군수의 견제 없는 열정도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하의도에 만들 평화의 상징이 무엇이어야 할지는 전문가 논의를 거쳐야 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이미 군수의 마음에는 상징물로 천사상이, 제작할 사람으로는 최씨가 들어서 있었다. 누가 토를 달 것인가. 그래서 검증하고 견제할 시스템이 중요하다. 주민 혈세를 쓰는 작품 구입 과정에는 외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작품 구입 심의위원회 같은 행정 장치가 있어야 했다. 이번 사태로 전문가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가 인식했으면 한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