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이동하던 중 라디오를 틀었다. DJ가 한 청취자의 사연을 읽었다. 요즘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 가운데 서로가 하나 될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하다며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신청곡으로 들려 달라고 한다.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당신이 지치고 자신이 작게만 느껴질 때, 당신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제가 그 눈물을 닦아줄게요. 저는 당신 편이에요. 힘든 시간이 다가오고 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험한 물살 위에 놓인 다리처럼 제가 다리가 되어 드릴게요.”
험한 세상이다. 도로 하나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와 정치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치기를 하고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설교와 기도 몇 마디에 분노와 혐오를 표현한다. 교회 아이들마저도 “너는 찬성파야, 반대파야”라며 편을 가른다. 어른들의 추한 싸움에 순수함까지 매몰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도 험하고 괴롭게 느껴진다.
광장과 매스미디어, SNS에 쏟아지는 시국 관련 구호와 외침 속에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은 지치고 힘들어한다. 존재의 미미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쪽의 구호가 크게 들리면 들릴수록 자기들이 맞는다고 하고, 저쪽의 외침이 시끄럽게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목소리만 들린다. 그 사이에 ‘우리는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진심 어린 목소리는 먼지처럼 작고 깃털처럼 가볍게만 여겨진다. 그래서 눈물이 고이고 마음이 아프다.
예배 때마다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장로는 자기 반대편의 사람들을 향해 “그들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는 푯말을 들고 집회에 나가고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말하던 집사는 다른 진영의 사람들에게 “박멸하자, 타도한다, 없애 버리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족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친구의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서로 불편하지 않았고 ‘우리’라는 표현으로 한반도에 사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서로 인정하며 살지 않았던가. 그래도 교회만큼은 그런 우리나라의 정서를 품어내 어린아이부터 곧 호흡이 다할 것 같은 어르신까지 함께하는 곳이었고 세상이 갈라지고 나누어져도 하나 돼야 한다고 외칠 수 있었다.
한국기독교 선교 초기, 교회는 갈라져 있는 반상 제도를 없앴고 거부감이 가득했던 서구의 문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남녀노소의 문턱을 낮추고, 더욱 하나 된 천국의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한국 근대사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였고 곳곳에 나뉘고 갈라져 있는 것들을 이어 붙이고 함께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는 세상과 같이 갈라지고 있고 나뉘며 분열시키는 선두에 서 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성도들은 눈물을 짓고 있고 세상의 사람들도 똑같이 슬퍼하고 있다. 그 안에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노래가 소망을 준다. 이 노래가 다시 회복해야 할 복음을 찾게 하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되찾게 한다. “험한 물살 위에 놓인 다리처럼 제가 다리가 되어 드릴게요.”
교회는 다시 다리(Bridge)가 돼야 한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험한 물살이 흐르는 세상 위에 안정과 평안을 줄 수 있는 다리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만큼은 동서 좌우 남녀 노소를 함께 아우르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도로 하나를 두고 서로 갈라져 완전히 반대되는 구호를 외치는 양쪽의 사람들은 몇 달 전만 해도 함께 교회 식당에서 반찬을 나눠 먹던 선후배였고 교회학교의 선생님과 제자였으며 같은 기도 제목을 나눠 기도하던 중보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험한 세상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라져 있다면 교회는 다시 함께, 같이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먼지처럼 작아지는 것 같아도 우리는 사랑을 기도해야 하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아도 우리는 화해와 용서를 선포해야 한다.
반목의 지점에서 서로 다른 광장에 앉아 있는 우리의 친구들은 언젠가 다시 한곳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날을 소망하며 이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진정한 사랑과 긍휼을 전하는 교회를 지켜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공의와 함께 사랑을, 심판과 함께 긍휼을 드러내는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