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시크 쇼크'로 세계가 떠들썩한 가운데 반도체업계에서도 최근 중국발 빅뉴스가 나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5일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수율을 1년 만에 20%에서 40%대로 끌어올렸다고 보도했다. 40% 수율이면 수익을 낼 수 있는 수준이다. 화웨이는 이를 업계 표준인 6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미국의 제재로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구형 장비로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첨단 반도체를 만들어도 수율을 올리지 못해 가격 경쟁력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는데 화웨이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이 AI 반도체는 화웨이가 설계하고 중국 파운드리(위탁생산) 1위 기업 중신궈지(SMIC)가 만드는데 대부분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이 설립하는 데이터센터에 들어간다. FT는 “미국의 수출 통제에도 불구하고 화웨이가 수율을 끌어올린 것은 AI산업 자립을 위해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중국에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전략산업 육성과 美 기술 통제
중국은 2000년대 초반 반도체 수입액이 석유 수입액을 능가한 데 경각심을 갖고 반도체 기술 자립에 나섰다. 국무원은 2006년 ‘국가 과학기술 발전 중장기 계획(2006~2020년)’, 2015년 ‘중국제조 2025’를 발표하면서 반도체를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2014년부터 3차례 반도체 투자 기금을 조성했는데 총액이 130조원을 넘는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미국의 기술 통제에 부닥쳤다. 미국은 2019년부터 국가 안보와 군사적 위협 등을 이유로 화웨이 등 중국 반도체 기업들에 강력한 제재를 부과했다.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미국 기술을 활용한 반도체의 공급을 막았고, 2020년에는 TSMC와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 업체들이 화웨이의 반도체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미국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이 7나노(10억분의 1)미터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는 것도 금지했다. 중국에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만 3000곳이 넘는데 첨단 반도체를 설계해도 생산을 위탁할 곳이 없어진 셈이다.
‘제재의 역설’ 기술 자립에 집중
미국의 제재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은 기술 자립에 집중했다. SMIC는 2023년 구형 장비로 7나노미터 공정의 첨단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 SMIC가 EUV 없이 7나노급 반도체를 양산하자 화웨이는 SMIC와 협력해 7나노급 최첨단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화웨이는 지난 10년간 반도체 연구·개발에만 216조원을 투입해 자체 설계력을 확보했다.
창장메모리(YMTC)는 낸드플래시 반도체의 강자로 최근 294단 낸드 양산을 시작했다. SK하이닉스가 321단, 삼성전자가 286단을 양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격차가 거의 없다. 삼성전자는 최근 차세대 낸드 공정에 YMTC의 특허 기술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는 지난해 12월 첨단 D램 DDR5 양산에 돌입했다. 2020년 처음 상용화된 DDR5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D램 제품이다. 이전 세대인 DDR4 D램은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는 데 6년이 필요했지만 DDR5 D램은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 기업들이 중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을 제한하기 위한 미국의 수출 통제에 맞서 회복력을 발전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짚었다.
CXMT는 최근 28만㎡ 규모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공장도 건설하기 시작했다. AI용 핵심 반도체인 HBM은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다.
닛케이아시아는 “미국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5년 만에 0%에서 5%로 급증했는데 올해 10%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한국 기술 수준 대부분 추월당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중국에 대부분 추월당했다”는 전문가 설문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해 논란이 됐다. 메모리반도체 등 일부를 제외하면 반도체산업에서 한국이 중국에 앞섰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다.
중국의 강점은 팹리스, 파운드리, 메모리, 메인프로세서, 그래픽처리장치 외에 소재·장비까지 독자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중국 상하이마이크로전자는 노광 장비, 나우라테크놀로지는 식각·증착 장비, 중웨이반도체는 플라즈마 식각 장비를 양산한다. 상하이마이크로전자는 미국에 의해 수입이 금지된 EUV 노광 장비 개발도 추진 중이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은 지난달 17일 시진핑 국가주석이 참석한 민영 기업 좌담회에서 “핵심(반도체)과 영혼(PC 운영체제)의 부족에 대한 중국의 우려가 완화됐다”며 자신감을 표했다. 런 회장은 이날 2028년까지 기술자립률 70% 달성을 위한 ‘스페어타이어 2.0’ 계획을 세워 2000여개 중국 기업과 함께 생태계 구축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베이징=송세영 특파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