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재 목사의 후한 선물] 그럼에도 살아냅시다

입력 2025-03-04 03:03

‘그럼에도’라는 말에는 놀라운 역설이 담겨 있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 속에 감춰진 역전의 가능성과 함께 절망의 순간 속에 뿌려진 희망의 씨앗을 보여준다. 세상의 논리는 ‘실패 때문에 끝났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고 선포한다. 약함이 강함이 되고 죽음이 생명으로 승화되는 게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다.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마저 모두 잃은 상황에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고백한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건 앞에서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옳으시다”고 선언했다.

한 성도는 1급 장애가 있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거꾸로 부모님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기에 ‘착한’ 가면을 쓰고 살았다.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두 아들도 낳았다. 행복과 성공을 위해 성실히 살았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친구를 굳게 믿고 큰돈을 투자했는데 배신을 당한 것이다. 투자한 돈을 모두 잃었다. 그 여파로 수입은 크게 줄고 지출은 크게 늘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빚을 냈고 그렇게 시작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족들 볼 면목이 없었고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점점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급기야 자살을 결심하고 ‘디데이’까지 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몰고 가던 중 우리들교회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그럼에도 살아냅시다’라는 문구였다. 자신은 지금 고난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데 왜 살아내라고 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날 그는 내게 이메일을 보냈고 즉시 ‘이번 주일 예배에 참석해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 보시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가 처음 예배에 참석한 날은 부활절 전도 축제였다. ‘심히 창대하리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그가 이메일로 보낸 사연이 나왔다. 이어서 그는 “인생의 크고 작은 고난이 주님의 말씀으로 해석되면 그보다 창대한 일은 없다”는 말씀을 들었다. 창대함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미약함이 있어야 하는데 욥처럼 고난 가운데 주님을 만난 구원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심히 창대한 것이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 예배드리며 그는 자기 목숨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죽으려 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고 회개했다.

그는 그날 교회에 등록했다. 배정된 소그룹은 소위 ‘부도 목장’이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진 빚보다 수십 배 많은 빚을 진 사람이 있었다. 자신과 달리 부도 때문에 죽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말씀과 교회 공동체에 힘입어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공개하곤 지체들의 모습에 위로와 도전을 받아 공동체에 정착했다.

그 후 크고 작은 일을 지체들에게 물었으며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러자 어느덧 경제적 고난에서 벗어나게 됐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회복됐다고 한다. 교회 현수막을 본 날부터 11년 지난 얼마 전 그는 소그룹 리더가 됐다. 교회에서 말씀으로 치유받은 그는 과거 자신과 같은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다른 지체들을 살리는 사명을 맡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라고 말씀한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된다. 인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일이 큰 고통과 수치였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 사명의 삶을 살아내셨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삶의 가치다. 우리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매일 살아낼 때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그럼에도 살아내야 할 이유다.

김양재 우리들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