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고인 물’ 한국 경제

입력 2025-03-04 00:38

100만명이 굶어 죽었다. 고작 8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약 800만명이던 아일랜드 인구는 아사(餓死)와 이민(사실상의 집단 탈출)으로 600만명까지 주저앉았다.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의 수탈과 정책 실패가 빚은 참상이었는데, 방아쇠는 곰팡이의 일종인 감자역병균이 당겼다. 당시 영국의 가혹한 곡물 강탈로 아일랜드인은 감자에 의존해야만 했다. 농지의 3분의 1이 감자밭이었고, 수확량이 높은 품종 하나에 매달렸다. 덩이줄기를 잘라 심는 탓에 아일랜드 감자밭의 감자는 대부분 같은 유전자를 지니게 됐다.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지면 질병이나 기후변화 같은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결국, 다양성의 부재는 국가적 재앙인 대기근이라는 결말을 썼다.

생물에게 유전적 다양성은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전 세계 작물 가운데 밀과 쌀, 옥수수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바나나도 비슷한 처지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개량을 거친 씨 없는 품종인데, 땅과 가까운 줄기를 잘라 옮겨 심는 식으로 번식시킨다. 새 바나나 나무는 어미 바나나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사하는 셈이다. 1950년대 곰팡이 ‘푸사륨’이 일으키는 파나마병으로 그로 미셸이라는 품종의 바나나는 멸종했다. 빈자리는 지금 널리 재배되는 캐번디시가 차지했다. 하지만 푸사륨의 변종이 나타나면서 캐번디시도 위기에 처했다. 내성을 지닌 새 품종을 개발하지 않으면 바나나를 먹기 어려워질 수 있다.

유전적 고립이 부르는 비극은 생물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사회도, 경제도 다양성을 잃어버리면 고인 물로 전락한다. 고인 물은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와 기생충이 폭발적으로 서식하는 ‘마실 수 없는 물’, ‘기능을 잃어버린 물’이 된다. 지금 한국 경제가 딱 고인 물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5일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신랄한 반성문을 내놨다. “수출 경쟁력이 많이 낮아졌기 때문에 과거처럼 수출로만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새로운 산업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우리 정부가 가장 뼈아프게 느껴야 할 것은, 지난 10년간 새 산업이 도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앤드컴퍼니가 2023년 10월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년과 2022년의 한국 주력 수출품(수출 상위 10개 품목) 목록은 디스플레이 하나 빼고 그대로였다. 20년 전에도 반도체는 수출 1위였고 그 아래로 순위만 바뀌었을 뿐 자동차, 자동차 부품, 선박, 석유화학, 철강, 석유제품, 전자제품이라는 구성이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경제가 고인 물이 되고 있다는 건 돈의 흐름으로도 드러난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1505명을 대상으로 ‘한·미 자본시장에 대한 인식’을 설문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54.5%가 미국 증시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27.2%는 이유로 ‘기업의 혁신성·수익성’을 지목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주력 수출품을 보면 70년대 1위는 섬유였고 2위 의류, 3위 선박이었다. 80년대 들어 선박, 섬유, 의류 순으로 바뀌었고 90년대 들어 반도체, 자동차, 선박으로 변신했다. 어쩌다 다양성과 역동성을 잃고 고인 물이 됐을까. 이유는 빤하다. 새로운 산업·기술이 유발하는 사회적 고통과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망각해서다. 누가? 정부와 정치권이. 일자리를 잃은 이에게 새 일을 주고, 피해를 본 국민·기업이 재기하도록 도우면서 경제·산업 구조개혁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러니 누구도 혁신에 뛰어들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이대로 가면 한국 경제는 외부 충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아일랜드 감자 신세가 될 거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