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수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백악관 기자단 개편의 나비 효과… 미·우크라 노딜 참사

입력 2025-03-05 00:32
지난달 26일 마가(MAGA) 모자를 쓰고 ‘기술 지원’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채 백악관 각료회의에 참석한 일론 머스크(왼쪽 사진). 지난달 2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군복 스타일 옷을 입고 백악관을 찾은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때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도 군복을 입고 백악관을 방문했다(오른쪽). AFPAP연합뉴스, 엑스 캡처

트럼프·우익매체, 젤렌스키 옷 조롱
분위기 얼어붙으며 회담 결국 결렬
‘티셔츠 각료회의’ 머스크와 대조적
서방 균열 극적으로 드러낸 한 장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전쟁 중인 젤렌스키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오는 건 무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론 머스크가 마치 마이애미에서 열린 비트코인 콘퍼런스에 참석하는 것처럼 입고 백악관에 오는 것에는 박수를 보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고성과 삿대질로 윽박지른 지난달 28일(현지시간), 190만 팔로워를 가진 정치평론가 아나 나바로 카르데나스는 엑스에 머스크가 모자 쓰고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썼다.

공화당 소속으로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등과 함께 일했던 정치평론가의 시각에서도 상대국 정상의 복장을 조롱하는 일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당 소속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은 소셜미디어에 머스크가 ‘기술 지원’이라고 적힌 검은색 티셔츠를 자랑하는 사진을 올리면서 “이제 젤렌스키가 검은색 셔츠에 ‘기술 지원’이라고 쓰고 검은색 ‘마가(MAGA·미국을 위대하게) 모자’만 쓰면 백악관 드레스 코드에 맞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서방의 균열을 극적으로 드러낸 이날 충돌은 정상들의 드레스 코드와 백악관 출입기자단 개편이라는 두 가지 사건이 공교롭게 겹치면서 거대한 외교적 ‘나비 효과’를 불러왔다.

트럼프는 회담 전부터 젤렌스키의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젤렌스키는 이날 군복 스타일의 검은색 스웨터와 카고바지, 부츠를 신고 백악관 입구에 도착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를 맞이하면서 “오늘 멋지게 차려입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젤렌스키의 옷차림을 비꼰 것이다. 젤렌스키는 다소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불쾌한 티를 크게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악관 집무실에서 한 출입기자가 드레스 코드와 관련해 모욕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파국이 찾아왔다. 우익 방송 ‘리얼아메리카보이스’의 기자 브라이언 글렌은 젤렌스키에게 조롱하는 어투로 “왜 정장을 입지 않느냐. 이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격식의 장소인데 당신은 정장 입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냥 확인하고 싶다. 정장은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J D 밴스 부통령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이 굳어진 젤렌스키는 “이 전쟁이 끝나면 입겠다. 당신 슈트와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좋은 것을 입을 수도 있다. 아마 더 싼 것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회담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슬아슬한 대화가 이어졌고 결국 트럼프와 젤렌스키는 충돌했다.

글렌이 소속된 리얼아메리카보이스는 2020년에 만들어져 2020년 대선과 2021년 의사당 폭동 등에서 트럼프 편을 들며 각종 음모론을 퍼뜨린 매체다. 이 매체는 정상회담에서 ‘보조TV’ 역할을 맡도록 선정됐는데, 이 역할은 지난주에 처음 생긴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백악관이 대통령 근접 취재 기자를 직접 선발하기 시작하면서 글렌이 정상회담을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가까스로 얻은 셈이다. 하지만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정 체결이 예고된 자리에서 그는 상대국 정상의 옷차림을 조롱하며 정상회담 파국에 일조했다.

우익 논평가들은 환호하며 젤렌스키 조롱에 동조했다. 글렌의 여자친구인 극우 성향의 마저리 테일러 그린 공화당 하원의원은 한술 더 떠 “대통령에게 돈을 구걸하러 오면서도 오벌오피스(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장조차 입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미국을 얼마나 존중하지 않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항상 군복을 입어 왔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전투에 동참한다는 취지였다. 정상회담은 물론 미국 의회 연설에서도 정장 대신 군복을 입었다. 하지만 미국 우익들은 이전부터 그의 복장을 공격해 왔다. 밴스는 상원의원 시절인 2023년 젤렌스키가 군복 차림으로 상원 회의실에 온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이런 복장은 선을 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퍼주기’만 한다는 인식과 맞물리면서 더욱 증폭돼 정상회담에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이들은 머스크의 복장을 거론하며 트럼프의 이중 잣대를 비판했다. 트럼프는 전쟁 중인 우방국 정상이 입은 군복에는 비아냥대면서도 모자에 티셔츠 차림으로 백악관 각료회의에 들어온 머스크에겐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젤렌스키를 지지하는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사진을 올리며 트럼프와 미국 우익 언론의 무례를 질타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제독은 소셜미디어에 처칠의 사진을 올리고 “젤렌스키가 백악관에 갔을 때 트레이드마크인 캐주얼한 전투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두고 말도 안 되는 논평이 많다”며 “20세기 최고의 지도자였던 처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사진을 보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젤렌스키는 2일 찰스 3세 영국 국왕을 예방한 자리에서도, 앞서 유럽 정상들과의 회동에서도 군복을 입었지만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