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백악관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나자 충격에 휩싸인 유럽에서 미국을 향한 성토가 빗발쳤다.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1일(현지시간) 엑스에서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전날 회담 결렬과 관련해 “자유세계에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유럽인에게 달렸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접경국인 에스토니아에서 지난해까지 총리를 지낸 칼라스 대표는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침략자에게 맞서 싸우도록 지원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가브리엘 아탈 전 프랑스 총리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다”며 “미국은 자유세계의 리더라고 주장할 자격을 상실했다. 그 역할은 이제 유럽에 주어졌다”고 강조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젤렌스키의 엑스 계정에 직접 메시지를 보내 “친애하는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 친구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다”고 응원했다. 폴리티코는 “스웨덴·스페인·체코·라트비아·리투아니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충돌을 계기로 유럽의 자강론은 더 힘을 받게 됐다. 프랑스 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낸 도미니크 드빌팽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제 러시아·중국·미국이라는 세 개의 비자유주의 초강대국을 갖게 됐다”며 “미국을 더는 유럽의 동맹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더는 환상을 믿지 말라. 트럼프는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의 워싱턴 방문을 계기로 전쟁 종식의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기대했던 우크라이나군 내부에선 미국을 향한 반발심이 높아졌다. 키이우인디펜던트는 “전 세계가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충돌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때 최전방 우크라이나 병사들은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고 있었다”며 “우크라이나군은 트럼프와 미국에 대한 실망감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의 한 저격수는 “내가 젤렌스키였어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EU 회원국 중에는 트럼프 방식의 종전론을 지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트럼프가 평화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했다”고 치켜세웠다. 로베르토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도 미·러 주도의 협상을 지지하며 “즉각적인 휴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2일 BBC 인터뷰에서 트럼프, 젤렌스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모두 통화했다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와 협력해 교전 중단 계획을 세운 뒤 미국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타머 총리는 이날 오후 런던에서 젤렌스키와 유럽 주요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안보 관련 긴급 회의를 열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