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밸류업? 차가운 머리로 접근해야

입력 2025-03-04 00:34

오늘날 우리는 감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옷, 신발, 찻잔 등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상품은 감성을 자극해야 잘 팔린다. 심지어 작가가 책 제목을 뽑을 때도 독자들의 감성을 낚아채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국회와 정부가 경제주체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결정할 땐 감성이 아닌 차가운 이성으로만 판단해야 한다.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많은 이들이 큰 고통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저임금 노동자가 제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감성으로만 무리하게 2017년부터 3년간 30%나 올렸다가 음식, 숙박업 등 취약업종 일자리는 감소했고, 수많은 영세 사업자들은 인건비 부담으로 폐업했다. 근로자와 사업주 모두 역풍을 맞은 것이다.

최근 감성에 호소하고 있는 제도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자는 상법 개정안이다. 우리 증시가 저평가받는 원인이 이사가 회사의 대표인 대주주 눈치만 보는 낙후된 지배구조 때문이라며 이사들이 모든 일반 주주에게 충실 의무를 지게끔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주들이 회사가 주주환원에 소홀했다는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주주 충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과연 이런 법이 시행돼 주주환원이 확대되면 증시가 밸류업될까. 데이터는 아니라고 말한다. 2010년부터 2022년 사이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 매입한 자사주 총액을 보면 인텔이 834억 달러, 삼성전자는 203억 달러, TSMC는 200만 달러였다. 순이익 대비 자사주 매입 비율이 인텔은 47%, 삼성전자는 6%, TSMC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 기간 인텔은 시총이 감소했고, 삼성전자는 2.4배 성장했지만 TSMC는 6배나 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미래를 위해 연구·개발과 시설 투자에 사용돼야 할 자금이 주주환원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제조업 기반 경제에서는 주주환원의 무리한 확대로 투자가 감소하면 기업의 성장성 둔화로 증시 매력도가 크게 훼손될 수 있다.

그럼 주주들에게는 좋을까. 국내 상장사를 대상으로 고배당 회사들과 저배당 회사들을 비교 분석했을 때 배당소득과 주가의 평가이익을 합한 총주주수익률(TSR)은 저배당 회사들이 훨씬 높다. 일률적이지는 않지만 배당의 증가와 주가 간에는 통상 역비례 관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상법 개정으로 배당이 늘면 주가 상승폭 둔화에 따른 총주주수익률 감소로 장기 투자자들의 경우 과거에 비해 손해를 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증시 유동성도 감소할 수 있다. 주가는 미래 실적의 현재가치라고 한다. 미래 전망이 밝지 않으면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상법이 개정되면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이 담보되지 못한다. 신산업 진출은 과거 반도체, 이차전지처럼 초기에는 실적 악화에 따른 주가 하락이 수반되는데 이사들이 주가 하락에 대한 주주 소송이 무서워 과감한 투자 결정, 인수·합병 등을 주저하게 돼 미래 먹거리 확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럼 증시 밸류업의 로드맵은 무엇일까. 답은 하나다. 바로 기업들이 잘 성장해 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업의 실적 개선과 풍부한 유동성이 맞물린 황소장세(Bull Market)가 연출될 수 있다. 부디 국회는 영국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이 말한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의 의미를 곱씹어 세상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되 냉철한 이성에 기반한 입법을 해줬으면 한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