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농구협회는 최근 국가대표팀의 국제 경쟁력 회복을 목표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한국 농구의 저변 확대가 대표팀 성장의 토대가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새로운 방식의 대회를 개최하고 선진국형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떨어지는 농구 인기에도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던 시절도 있었지만 과감하게 첫발을 뗐다. '농구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정재용 협회 상근부회장은 "작은 변화가 지속되다 보면 아시아 정상 복귀라는 목표를 이루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조금씩 희망을 본다"며 "새 시스템의 정착은 국제 경쟁력 회복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농구의 경쟁력 하락은 꽤 오래된 이슈다. 한국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농구에서 사상 최초로 남녀 동반 우승을 했다. 이때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 농구의 강호였다. 이후 국제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옛말이 됐다.
최근 2025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예선을 마친 남자 대표팀 주장 이승현(부산 KCC)은 “농구 경쟁력이 떨어진 사실을 선수들도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자 농구의 베테랑 김단비(아산 우리은행)는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경쟁력이 후퇴한 현실을 언급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수많은 과제가 놓여 있지만 협회는 변화를 시작했다. 정 부회장은 농구미래발전위원회를 이끌던 2023년 5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 농구 미래발전 전략 보고서’를 만들었다.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전문체육을 통합한 중장기 발전전략 수립 및 실행을 통해 농구 저변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프로 1군과 2군, 전국 및 광역지자체, 시군구 리그에 이르는 1~5부의 디비전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세부적인 계획이 소개됐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아우르는 100만 농구선수 양성, 10만 농구팀 시대 개막, 2032년 하계올림픽 남자 8강, 여자 4강 등 구체적 목표가 제시됐다.
당장 올림픽 출전은커녕 아시아에서도 뒤처지는 게 한국 농구의 냉혹한 현실이다. 보고서 발간 후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갖는 이들도 많았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정 부회장은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디비전 시스템 구축을 위한 사전 준비에 나섰다. 고교·대학 엘리트 운동부가 성인 동호회 최강팀과 겨루는 농구 코리아컵, 코리아 3×3 올팍투어 등 대회를 개최했다. 올해는 초등학교 엘리트 운동부와 클럽팀이 맞붙는 대회가 열린다. 선수 출신과 비선수 출신의 경계를 지우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지난달 25일 만난 정 부회장은 “최초의 비선출 프로 선수 정성조(고양 소노)와 같은 사례가 쉽진 않겠지만 엘리트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면 인적 인프라 확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디비전 시스템 안에선 프로와 아마추어 모두가 선수로 통하게 된다. 농구인들이 하나로 뭉쳐 붐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팬들 사이에선 1990년대 흥행했던 ‘농구대잔치’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지금의 한국 농구가 과거만큼 재밌지 않다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정 부회장은 “저 또한 농구대잔치의 전성기를 겪은 세대라 안타깝다”며 “농구 코리아컵을 프로와 세미 프로, 아마추어 팀이 모두 참가하는 잉글랜드축구협회컵(FA컵)처럼 권위 있는 대회로 만드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협회는 디비전 리그 참여를 위한 선수 등록 시스템, 통합 기록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스포츠에선 소소한 기록 하나가 곧 스토리다. 정 부회장은 “유스 대회 때 테스트를 해봤는데 시스템에 선수로 등록되고 기록도 나오니 반응이 좋았다”며 “모든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올해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엘리트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1년 만에 접었다. 구타가 난무하던 1980년대 운동부 시스템을 겪고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단다. 이후 한국이 스포츠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언론사 기자 생활을 거쳐 농구협회에 입성했다. 취미로 농구를 즐겼던 터라 다른 종목보다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정 부회장은 “어떤 종목이든 스포츠계가 결국 산업화의 길로 가야 한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 좋은 정책이 나와도 종목마다 상황과 현실이 달라 일괄 적용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성공 모델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친숙한 농구가 그런 모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협회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 그가 제시한 새 시스템을 낯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속된 인기 하락에 지친 농구인들도 많았다. 그는 “농구인들의 자존감이 떨어지고 희망을 찾지 못한 게 농구계의 큰 문제였다”며 “협회가 다양한 사업을 시도하고 예산도 확보했다. 조금씩 변화 분위기가 감지되니 동력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마스터 플랜’은 그려졌다. 전국에 등록된 엘리트 선수는 2700여명이다. 협회는 장기적으로 재능 있는 선수를 발굴·육성해야 한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새 시스템이 정착하기까지 기존 엘리트 선수들이 버텨줘야 한다.
협회는 지난해 12월 한국농구연맹(KBL), 한국여자농구연맹(WKBL)과 ‘농구 국가대표팀 협의체’를 꾸렸다. 2014년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던 협의체가 10년 만에 부활했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대표팀의 효율적 운영, 경쟁력 강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남녀 대표팀의 귀화선수를 찾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정 부회장이 직접 ‘농구협회 브리핑’이라는 콘텐츠 영상에 등장해 정책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농구계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협회가 추진하는 정책을 설명하기 어려워 영상을 만들었는데 일반 팬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 부회장은 “팬들이 댓글로 많은 의견을 준다. 협회가 하는 일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며 “앞으로도 진행 중인 사업을 꾸준히 알리겠다. 소통을 강화해서 좋은 의견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좋은 밑그림이 나왔으니 재정적 후원도 늘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결국 미래를 위한 중장기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현실적인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는 “지금의 농구협회는 어떤 종목단체보다 혁신적이고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고 자부한다. 관심과 도움을 주시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정 부회장은 추진 중인 시스템 개혁을 두고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보다 농구를 잘하는 한국 대표팀을 만드는 건 냉정하게 어렵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형 시스템을 갖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며 “세계적 수준의 농구 시스템을 만들고 향상된 경기력을 이끌어내는 게 저의 목표이자 꿈”이라고 말했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