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착해도 괜찮아

입력 2025-02-28 00:37

올해만큼 새해 인사를 잊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인 줄 알았는데, 최근 만난 친구들도 대부분 그랬단다. 송년모임은 취소됐고, 친한 이들에게 문자로 전하는 손끝 인사도 드물었다. 그만큼 모진 연말이었다. 무책임한 정치가 불러온 국가적 위기가 있었고, 대형 참사가 잇달았다. 지난 한 해를 숙고하고 새해의 안녕을 기도할 새도 없이, 우리는 품 안의 이들의 안위와 나라 걱정을 해야 했다.

비정한 정치는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던 이들에게도 굳이 어느 편인지를 따져 물었다. 태극기, 친문, 개딸, 극우보수로 이어지는 맹목적 정치집단의 릴레이는 더욱 집요하게 편을 가른다. 애써 정치를 멀리했던 이들, 아직 정치에 관심이 없던 젊은이들, 정치는 모르겠고 자식 걱정이나 하던 노년에게 이들은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따진다. 그나마 성장 스토리라도, 입바른 말이라도, 인격 하나는 훌륭한 이라도 있었다면 큰 고민 없이 답했을 텐데. 그들만의 권력 다툼에 내 살림은 무너지고 있는데, 편까지 들라 하니 그저 속앓이만 할 뿐이다. 각박한 살림살이는 삶의 예민함을 키운다.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으로 바글바글했던 여의도 국회 앞 음식점은 요새 오후 8시 정도면 텅텅 비기 시작한다. 동네 터줏대감을 자처하던 노포들이 어느 순간 문을 닫는다. 직장인? 통계청의 2023년 임금근로일자리 소득 조사 결과 근로자 월급 인상률은 2.7%로, 집계 이래 가장 낮았다. 소비자물가 상승률(3.6%)보다도 낮았는데 이 역시 사상 처음이다.

쿠팡에서 전자제품을 사서 한 달씩 쓰고 환불한다거나, 온라인으로 옷을 사 태그를 떼지 않고 입다 반품한다거나, 가벼운 교통사고에 입원해 합의금을 두둑이 받아냈다거나…. 이런 사례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쩌면 내가 너무 순진하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기어이 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인의 평안을 위협받고 있지만 이번엔 웰빙도, 힐링도, 소박했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마저 없다. 이 고통스러운 삶은 지난해 자살자 수가 1만4439명, 하루에 40명에 달한다는 통계로 나타난다. 우리는 마음을 위로할 동아줄을 찾지 못한 채 집단 우울증의 늪으로 자꾸 끌려들어가고 있다.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이들을 소개하려 한다. 경기도 부천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백원선(69)씨 부부는 지난해 한 청년으로부터 “감사하다”는 손편지와 함께 현금 20만원을 받았다. 이 청년은 매일 캔커피를 하나씩 사던 단골이었으나, 어느 날 “실직 상태여서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라면 하나를 외상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백씨 부부는 이런저런 음식을 함께 들려 보냈고, 청년은 6개월 만에 화답했다. 전신마비 장애인 박완금(66)씨는 왼쪽 어금니로 볼펜을 물어 글을 쓴다. 은퇴한 환경미화원인 남편 김동덕씨는 동네에서 파지를 줍는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15년간 매달 10만원씩 진흥장학재단에 기부를 해왔다. 남편 김동덕씨는 “어차피 천국에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아깝지 않다”며 웃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김동호(24)씨는 7살 때 두경부암에 걸려 스무 번 넘게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지난해 10월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맨몸운동 대회에 나서 52개의 턱걸이로 챔피언에 올랐다. 그는 “사실 암 치료를 받는 중인데, 이런 모습이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의 사연은 모두 국민일보의 ‘아살세’와 ‘작은영웅’에 소개됐다. 지난해 연말 결산 ‘작은영웅’의 제목은 ‘여러분 덕분에 2024년을 버텼습니다’였다. 깨어 있는 착한 마음의 자발적 연대가 삶의 단단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 믿는다.

강준구 콘텐츠랩장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