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적극 도왔다… 잊힌 존재 외국인 영웅들

입력 2025-02-28 02:17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는 외국인입니다’는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25명의 이야기를 조명한 책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통역사 목원홍과 프랭크 스코필드, 앨버트 테일러와 부인, 프레더릭 매켄지, 밸런타인 매클래치, 이소가야 스에지, 후세 다쓰지, 가네코 후미코. 부키 제공

3·1 운동을 하루 앞둔 1919년 2월 28일.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던 이갑성은 세브란스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던 프랭크 스코필드를 찾아간다. 이갑성은 하루 뒤 만세 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에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만세 시위 당일 파고다공원에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3·1 운동 초기 사진들은 모두 스코필드가 찍은 것들이다. 사진 촬영에 집중한 스코필드는 일본인 가정집 2층에 올라갔다가 도둑으로 몰려 쫓겨나기도 했다.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스코필드는 3·1 운동의 ‘34번째 민족 대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스코필드는 그해 4월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벌어진 일제 학살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 날 현장으로 향한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상태였지만 수원역까지 싣고 간 자전거를 타고 현장까지 한달음에 갔다. 제암리 예배당에서 시신 23구를 수습해 묻어주고, 수촌리도 방문해 부상자를 돌봤다.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제암리의 대학살’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는 그해 5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에도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통신원’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출간된 책은 낯선 나라, 낯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고, 때로는 옥에 갇히고, 추방당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쳤던 ‘잊힌’ 외국인 영웅들을 소개하고 있다. 2024년 11월 현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8162명이다. 이중 재외동포를 뺀 ‘순수’ 외국인은 76명뿐이다. 저자들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서훈조차 받지 못하거나, 서훈은 받았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에 특히 주목했다. 저자들의 표현대로 ‘조국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며 한국 독립에 온몸을 던진 푸른 눈의 이방인’, ‘고국 사람들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히면서도 한국인 편에 서서 일제의 폭거에 맞서 싸운 일본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중국인’ 등 25명의 삶과 업적이 녹아 있다.


스코필드 외에도 3·1 운동과 이후 일제의 무도한 탄압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한 외국인들도 많았다. 갓 출산한 부인의 침대 밑에 세브란스 간호사들이 숨긴 3·1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로 내보내 전파시킨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 3·1 운동을 직접 취재해 보도하고 몰래 숨겨 나온 독립선언서 전문을 자신의 신문에 게재한 미국 언론인 밸런타인 매클래치 등이 그들이다.

또 항일 의병을 직접 찾아다니며 취재한 외국인 기자도 있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의 극동 특파원 프레더릭 매켄지는 1906년 여름 한국을 찾아 일제가 자행한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과정을 목격했다. 특히 항일 의병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경기도 양평 숙소에서 의병들을 직접 만났다. 매켄지는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다”는 의병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전한다. 그가 남긴 의병들의 사진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은 ‘항일 의병의 생생한 진짜 모습’이다.

영화 ‘밀정’에는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과 부부로 위장, 폭탄을 국내로 들여오는 작전에 참여한 루비크라는 유럽 출신 남성이 등장한다. 그의 실제 모델은 ‘마자르’로만 알려진 헝가리 출신의 폭탄 전문가다. 의열단 비밀요원으로 활약한 마자르의 도움으로 의열단은 방화용, 암살용, 파괴용 폭탄을 제조할 수 있었다. 폭탄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 투쟁의 성공을 확신하고 1923년 1월 일본을 강도로 규정하고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폭력 혁명을 정당한 수단이라고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책에는 조국 일본을 배신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약한 일본인들도 소개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네코 후미코다. 그는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일본 도쿄 법정에서 1926년 3월 사형이 선고되자 ‘만세’를 외쳤던 인물로 유명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사면장을 찢어 버리고 단식 농성을 벌이던 가네코는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당시 가네코와 박열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다. 3·1 운동 전후로 조선에 관심을 갖게된 후세는 한국인 유학생 9명을 무료 변론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사를 자처했고, 해방 후에는 일본에서 재일동포 차별에 맞서 다양한 공익 소송을 진행했다. 이밖에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장으로 해방 전까지 1100명이 넘는 한국인 고아들을 돌보고 일본에서 ‘한국인 앞잡이’로 불렸던 소다 가이치, 흥남 비료공장 노동자로 항일 운동에 나서 투옥되고도 해방 후에도 끝까지 소신을 지킨 이소가야 스에지 등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세·줄·평 ★ ★ ★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이 부끄럽다
·역사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계기가 되길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안중근)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