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세상 떠난 분을 ‘돌아가셨다’ 혹은 ‘별세하셨다’ 즉 ‘이 세상과 이별하셨다’고 표현한다. 서양에서는 ‘통과하셨다(passed away)’고 한다. 사람의 존재가 깡그리 없어졌다는 표현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의 수도 에덴 여러 곳을 방문한 후 헬라 시민을 두고 ‘종교심’이 많은 민족 같다고 기록했다.(행 17:22) 섬길 신이 너무 많아 이름을 다 지어 부를 수 없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힌 제단도 봤다고 했다. 모름지기 죽은 후 이름을 몰라 제사 지내지 못한 신들의 벌이 두려워서 한곳에 묶었던 것 같다.
수천 년 전 고대 유적지에서는 제사를 지낸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근래에는 듣기 힘든 표현이고 지방 사투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적 웃어른들은 “비가 오신다”고 했다. 자연 현상이 존경이나 두려움의 대상이라 존칭어를 쓰셨을까. 스티브 잡스가 자기 죽음을 응시하면서 고백한 이 말이 떠오른다. 책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두란노)에 소개돼 있다. “평생 축적된 이 모든 경험이 그냥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이상하다. 그래서 나는 뭔가 살아남는 게 있다고 본다. 어쩌면 우리 의식이 지속할 거라고 믿고 싶다.”
정말 눈에 보이는 현상 건너편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사람은 종교적 동물이다. 비록 발은 땅을 딛고 살지만 하늘과 땅을 연결해 보려는 도전 혹은 소망이 종교의 한 모습 아닐까.
역사를 통해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본다. 예전에 미국 시카고에 살 때 이야기이다. 각기 다른 종교에 관심 있는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내용은 달라도 각 종교의 목적과 관심이 이 세상을 초월한 무엇인가(‘구원’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더라도)에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다. 비교종교학에서도 다루지만 대개 구원 혹은 각기 종교의 우선순위에 이르는 방법에서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 방법론도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대부분 인간의 노력 혹은 공로에 치중돼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최종목적은 하나밖에 없는 높은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인데 그 길은 동서남북 여러 방향에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다는 원리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여기저기 여러 곳에서 지하수를 파 물을 공급받는다고 할 때 사실 깊은 땅속에서는 같은 큰물, 근원에서 나오는 같은 물이라는 이론이다. 이처럼 종교 다원주의의 이론은 무척 다양하다.
기독교는 산 정상에 오르는 유일한 길, 즉 구원이 어느 길이냐 하는 선택의 종교가 아니다. 인간은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시 51:5)했으며 인간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 3:17~18)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들은 단결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하고, “우리가 난공불락의 성을 세워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창 11:1~4)고 한다. 오늘날의 세속주의가 아닌가.
야곱은 화난 형 에서를 피해 조상들의 고향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저녁이 되자 유흥가와 같았던 루스라는 곳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이후 ‘사닥다리(계단들)’가 땅 위에 세워지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꿈을 꿨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사다리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봤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키리라. 땅 위의 모든 민족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 28:10~22)
우리는 땅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 즉 믿음의 계단을 오늘도 오르고 있다.
림택권 목사 (웨이크신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