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빠는 나를 결혼시키려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나 서른도 채 되지 않았던 당시의 나에게 결혼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결혼을 굳이 해야 한다면 미남과 하겠다는 철없는 나의 말에 아빠는 가슴을 쳤다. “너 이렇게 넋 놓고 있다 보면 버커리 되는겨.”
아빠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제맛 아닌가. ‘버커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사투리의 일종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버커리 타령이 계속되던 어느 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버커리는 표준어였다. “늙고 병들거나 고생살이로 쭈그러진 여자? 참 나, 이게 딸한테 할 소리야?”
충청도와 맞닿은 경기도에서 태어난 나는 사투리와 표준어가 섞인 환경에서 자랐다. 어른들이 쓰는 어휘 중에는 텔레비전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았다. 그럴 때면 그 단어가 표준어인지 사투리인지 궁금해 국어사전을 찾아보곤 했다. 할머니가 옆집에 갈 때마다 쓰던 단어인 ‘마실’은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을 뜻하는 표준어였고, 아빠가 언젠가 창업할 식당 이름으로 점찍어둔 ‘거시기’도 ‘하려는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쓰는 군소리’를 뜻하는 표준어였다. 내가 옷에 더러운 걸 묻혔을 때 “지르잡게 벗어 봐” 하는 엄마의 말은 정말이지 사투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더러운 것이 묻은 부분을 걷어쥐고 빨다’를 뜻하는 표준어였다.
언어의 세계는 끝이 없다. 얼마 전에도 엄마와 통화하다가 낯선 어휘를 하나 들었으니 말이다. 친척 언니의 아기가 첫돌을 맞이했다. 엄마는 금 한 돈짜리 반지를 해주고 싶은데 아빠의 반대로 반 돈밖에 해줄 수 없다며 투덜거렸다. 안 그래도 요즘 돈 나갈 데가 많아 부담스러우니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잔소리를 들었단다.
경제권을 쥔 남편이 그러라면 그러는 수밖에. 못내 아쉬워하는 엄마에게 금 한 돈이 얼마인가 물었더니 오십몇만 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좀 보탤 테니 한 돈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안쓰러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뼛심 들여 번 돈을 내가 어찌 받아.”
뚝심, 밥심, 뱃심, 뒷심, 입심은 종종 접했지만 ‘뼛심’이라는 단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엄마가 쓰는 말이니만큼 사투리일지도 몰랐다. 맥락상 ‘아주 힘들다’는 뜻을 지녔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저런 단어가 정말 존재할까.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만 ‘모든 육체적 활동의 바탕이 되며 몹시 어려운 처지를 이겨 나가려고 할 때 쓰는 힘’이라고 풀이돼 있었다.
맞아, 일은 뼛심이 들 만큼 힘든 거지. 몹시 어려운 처지를 이겨 나가야 일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겪는 이 힘듦은 당연한 거라 이 말이지. 일에 치여 유난히 지친 날이었건만 뼛심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니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요즘 들어 어휘력이 중요한 이유를 묻는 사람이 많다. “어휘력? 그냥 많이 알면 좋지, 뭐” 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려면 어휘력은 필수죠!” 하며 상투적으로 대답해 왔지만 이제는 달리 말하고 싶다. 어려운 처지를 이겨 나가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뼛심’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배신’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하지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모든 어려움을 물리쳤으면 ‘극복’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겪는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 끝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친척 언니에게 돌 반지를 전해줬다는 소식을 전하며 아기 사진을 함께 보내왔다. 분유 냄새가 폴폴 풍기는 아기의 모습에 “아이고, 이뻐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엄마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틈새 공격을 퍼부었다. “너도 괜찮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고생도 안 하고 좋을 텐데. 만나는 사람 진짜 없어?” “있는데 없다고 거짓말하는 거면 나도 참 좋겠네!”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텅 빈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오늘 저녁은 또 뭐로 때우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내 처지를 비관하던 것도 잠시,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노처녀’라는 단어가 생겨났을까. 맞아, 이 세상에 노처녀는 나 혼자가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