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미워하는 분노로 내 영혼을 파괴할 것인가… 헐뜯는 자를 포용하며 사랑으로 용서할 것인가

입력 2025-02-27 00:34
그래픽=강소연, 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의 정치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 의원 시절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물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상대방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프랭클린은 며칠 뒤 감사 편지와 함께 책을 돌려주었고 이후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벤저민 프랭클린 효과다. 도움을 준 사람이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이가 안 좋은 상대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무슨 꿍꿍이지?’ 하고 경계하지만 그 상대가 부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왜곡된 근본주의가 낳은 광장의 분노

갈등과 대립이 나라를 삼키고 있다. 날것의 분노가 퍼덕이고 미움과 적대감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사랑이나 관용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친구든 동료든 모두를 정죄하고 할퀴고 물어뜯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품격은 온데간데없다.

세계 역사를 보면 종교적 신념이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종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악한 사람들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게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고 했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랑과 자비, 긍휼과 용서가 기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쉽게 분노한다. 갈등과 폭력을 부추기기도 한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왜곡된 근본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근본주의는 19세기 말 서구 사회가 급속하게 세속화·과학화되면서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기독교의 근본적 가치들이 부정당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건강하게 출발했다. 성경의 무오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기적,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과 육체적 부활 등 5가지 근본적 가치를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점차 교조화돼 복음주의와 대척점에 서게 됐고 문화 사회 정치 분야까지 확대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극단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손을 잡았다.

이상학 새문안교회 목사는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음주의는 이성과 상식, 합리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반면 근본주의는 이들을 배제한다. 복음주의는 탈 정치적이다. 근본주의는 사회로부터 고립돼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에너지로 일하는 게 아니라 특정 정치 이념이나 문화 운동과 손을 잡고 기독교 운동의 흐름을 만든다.

세 번째 차이점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영성이 다르다는 점이다. 복음주의는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이어서 사랑과 용서, 자비와 관용, 포용과 연합 거기서 나온 진리와 정의가 기조에 흐른다. 근본주의는 전투적·호전적 영성을 갖게 되고 적대자를 설정해 없애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 본다. 그 영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분노와 적개심, 그 이면의 두려움과 불안이 심리적 기조로 흐르게 된다.

영적인 옥살이에서 벗어나야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며 상대방을 미워하고 집착하다 보면 삶이 황폐해진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은 심해진다. 마음의 유연성, 생각의 탄력성이 떨어지면 세상과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게 되고 마음의 병이 생긴다. 고대 로마 철학자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저서 ‘화에 대하여’에서 “어떤 전염병도 분노보다 인류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았다. 분노는 서로를 망치는 길이다”고 했다. 찰스 스탠리 목사도 저서 ‘마음 전쟁’에서 “마귀가 노리는 것은 한 평도 안 되는 당신의 마음이다”고 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조급하게 상대를 판단하고 심판하려 하지 말고 한 템포만 늦춰 사랑과 포용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미움과 분노는 사라질 수 있다. 화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일본 도쿄 내과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가마타 미노루는 ‘적당히 잊어버려도 좋은 나이입니다’라는 책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며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나약함의 증거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수록 우리는 한결 쉽게 현실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내장에 지방이 쌓이면 건강을 해치듯 삶에도 아무 의미 없는 습관이나 낡은 상식 같은 군살이 붙으면 인생의 자유를 빼앗고 하루하루를 괴롭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며 바로 잊어도 되는 것들은 잊어버리라고 조언한다.

뉴욕 리디머교회 설립자인 팀 켈러 목사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영적인 옥살이를 자초한다고 했다. 그는 저서 ‘용서를 배우다’에서 “복음을 믿으면서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값없는 용서로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이는 최소한 당신의 삶에서 복음의 실제 효과를 막고 있다는 증거다. 또는 당신이 복음을 아예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누군가 미워질 때, 화가 나고 억울할 때,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 ‘그래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해보자.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고 싶어하신다. 상대방이 험담하고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다듬기 위해 그 사람을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기획자이고, 모든 것에 우연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미움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분노와 용서

구약 성경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물만 받으시자 가인은 분노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분개하고 안색이 변한 것을 물으시며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신다. 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죄에 대한 욕망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신다. 분노는 죄로 연결된다. 가인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죽인다.(창 4:1~15)

예수는 사랑과 용서, 자비와 긍휼을 가르치셨다. 주인이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 얘기를 들은 주인은 그를 불러다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겼는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며 옥졸들에게 넘겼다. 성경은 경고한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무한대다.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고 물었다.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다.(마 18:21~22) 군인들이 예수를 잡으러 오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칼로 내리쳤을 때는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요 18:10~11)고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다.(눅 23:34)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이다.(요일 4:20)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예수가 얘기하는 자비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적극적 자세를 포함한다.

시편 94편의 저자는 이스라엘이 악인들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복수해 달라고, 교만한 자들에게 형벌을 내려달라고 간구한다. 그러다 징벌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려고 주시는 사랑의 징계로 생각하며 교훈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깨닫는다.

황명환 수서교회 목사는 “미움도 우상숭배”라고 했다. 우상은 내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가치인데 미움이 하나님보다 크게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도 나쁜 우상이라는 것이다. 나와 다르면 상대방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심판하기를 좋아하는데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악한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나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시편 94편의 저자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