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셰셰’에서 ‘생스’로 말만 바꿀 일 아니다

입력 2025-02-26 00:50

트럼프의 한국 등 전통 우방국
겨냥한 관세 폭탄 공세는
이젠 ‘공짜 점심’ 없다는 선언

경제 원조와 동맹에 기대고
표리부동한 태도로는
더 이상 신뢰쌓기 힘들어져

최근 CJ제일제당이 괌 등 전 세계 미군기지에 식물성 만두 납품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주한미군 기지에 고기만두를 출시한 데 이은 두 번째 쾌거다. 미군이 짬밥(잔반)으로 배출한 햄버거 패티와 스테이크, 소시지 를 가져다 부대찌개 조리 등으로 생계를 잇던 시절을 떠올리면, 한국 기업이 위생검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군 기지에서 식품을 파는 건 괄목상대할 만한 일이다. K푸드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 장면을 떠올린 건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협박이 오래전부터 미국의 시혜를 누려온 동맹국에 보내는 ‘값비싼 청구서’ 아닐까 하는 생각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트럼프 입장에서만 생각해보자. 한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데는 6·25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가 마중물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수많은 학자가 1960년대부터 ‘한강의 기적’ 토대인 경제개발 계획을 주도했다. 특히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생떼를 쓰다시피 하며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 기반의 안보 우산은 1인당 국민소득 3만6000달러로 일본을 제치고 비약적 발전을 하는 디딤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전통 우방 미국에 대통령으로 다시 등장한 트럼프가 관세 협박도 모자라 소프트 외교의 산실로 통하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해체를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는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로 약탈(ripoff)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트럼프만의 생각일까. 재임 시절 한국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던 버락 오바마조차도 대통령이 되기 전 펴낸 회고록에서 한인 상점 주인을 언급하며 한국인들이 경제적 실리만 추구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6년 대선에 이어 지난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 우선주의’가 대중의 호응을 얻은 것도, 이러한 정서가 미국 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트럼프의 인식에 다분히 감정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트럼프의 보호무역 기조와 동맹국에 대한 관세 압박의 근본적인 배경에 미국 경제를 대표해 온 자동차 산업의 몰락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한때 미국은 포드, GM, 크라이슬러를 앞세운 강력한 자동차 산업을 기반으로 중산층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 일본 독일 등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미국의 수많은 중산층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는 자국의 경쟁력 저하 때문이지 결코 다른 나라 탓은 아니다.

그럼에도 애초 미국의 전후(戰後) 원조 외교가 가난한 나라를 미국의 의도대로 성장시켜 미국 상품 시장으로 활용하려던 것 아니냐는 신식민주의 이론을 동원해봐야 먹혀들 리 없다. 자동차 산업이 쇠락한 것이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해외에 공장을 짓기 시작한 게 근본 이유 아니냐고 따지는 것 역시 우이독경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지정학적이든 지경학적이든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 지속과 안보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현실 때문이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애스모글루, 사이먼 존슨 교수의 2023년 작 ‘권력과 진보’는 트럼프를 옹호하는 글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지만, 미국 우선주의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설득력 있게 기술한다. 노벨상 발표 직후 국내 언론들이 앞다퉈 인용한 2012년 작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의 모범국으로 칭송한 것과 결이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물론 국내 언론들은 노벨상 발표 당시 속칭 ‘국뽕’에만 열을 올렸다.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를 단순한 찬사로 소비하기보다 그가 제시하는 시사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트럼프의 보호무역 기조와 동맹국에 대한 관세 압박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미국 내부의 구조적 변화와 정치적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지금의 세계 질서는 ‘공짜 점심’이 없는 냉정한 현실이며, 미국이 더 이상 전후 시혜적 동맹을 지속하지 않겠다는 점은 명확하다. 미국이 감정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우리도 감정을 내세우거나 원조경제 시대의 동맹 관계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어느 야당 대표처럼 중국에 셰셰하면 된다고 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 감사한다는 식의 표리부동한 태도로는 더더욱 신뢰를 얻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일관된 원칙과 전략을 바탕으로 국익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