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입력 2025-02-26 00:33

최근 한 배우가 조부의 친일 행적 논란이 일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비단 이 일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 중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개인이 사람들 앞에 사과하거나 심하게는 많은 비난을 받는 일이 있다. 이런 일들은 한 사회에서 개인의 책임 범위에 대해, 나아가 우리 사회가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상념에 젖게 한다.

우리 사회는 한 개인을 독립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연결된 집단의 일부로 여기는 경향이 적지 않다. 개인과 집단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현상은 공동체 의식이 강했던 동양권 문화에서 더욱 뚜렷하다. 동양 사회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권리보다 집단의 안정과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은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특정 집단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비난과 불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과거 동아시아 국가들은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가족과 친인척은 물론 지인과 동료, 같은 마을 사람까지 책임을 묻는 연좌제를 시행했다. 조선시대에는 반역죄나 역모죄를 지으면 부모와 본인, 자식들까지 삼족(三族)을 모두 죽였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가문이 폐족으로 전락했으며, 가족 중 한 명만 걸려들어도 가문 전체가 화를 겪었다. 연좌에 걸려도 본래 아이와 여성은 죽일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후환이나 보복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갓난아이까지 죽이는 일이 많았다. 연좌제는 개인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무고한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희생시켰으며 정치적 숙청의 도구로 악용됐다.

연좌제는 공식적으로 20세기에 이미 폐지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현실에선 개인의 행위와 무관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고 과도하게 비난하는 분위기가 있곤 했다. 범죄자의 가족이나 지인은 사회에 낙인이 찍혀 많은 비난을 받고 취업이나 대인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관련된 사람이 범죄를 공모했거나 혜택을 입었다면 의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 때도 있다. 가령 후손이 범죄자의 잘못을 통해 직접적인 혜택을 봤다면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친일 행적으로 축적된 부를 물려받아 지금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면 역사적 맥락에서 그 부의 정당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공적 인물이 역사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대중은 그 사람에 대해 윤리적 기대를 물을 수 있다. 이는 연좌가 아니라 역사적 정의 회복을 위한 정당한 요구다.

이와 달리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그와 무관한 사람에게까지 죄책감을 강요하거나 사회적 낙인을 찍는 방식으로 이뤄져선 안 된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과 선택을 그와 연관된 공동체 구성원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지만, 동시에 각자가 고유한 생각과 의지를 가진 독립적 주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혈통, 학맥, 출신 지역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개별적인 선택과 노력과 가치관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 당사자의 개별 행위가 아니라 혈통이나 조직이라는 이유로 이뤄진다면 이는 정당한 비판이라기보다 감정적 편견에 가깝다.

단순히 법적 처벌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낙인도 연좌의 또 다른 형태일지 모른다. 누군가가 친족이나 지인의 행동과 무관한데도 단순히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공격받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으며 인권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다. 과거의 성찰과 연대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일과 더불어 개인의 행위는 그 개인의 책임이라는 원칙을 고려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리라 본다.

박수밀(고전학자·한양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