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노인의 하루, 우리의 하루

입력 2025-02-26 00:33

근대화·성장 일군 어르신들
가난과 정서적 소외 시달려
포용력 키워 따뜻이 품어야

우연의 일치였을까. 하루 동안 생면부지 어르신과 세 번 이상 함께한 적이 있다. 10월, 청명한 가을날 이른 아침 한강공원 산책로를 함께 걷던 어르신을 만났다. 한참을 같은 길, 같은 방향을 걸었지만 목적은 달랐다. 어르신의 목적지는 산책로 마지막에 있는 교회의 무료 급식버스였다. 이른 시간대임에도 아침밥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주로 어르신들이었다.

오전 8시. 동호대교를 건너는 지하철 3호선, 그곳에서 어르신을 다시 만났다. 어르신은 지하철 안을 오가며 무료신문을 수거하고 있었다. 혼잡한 시간대여서 그런지 출근길 승객들이 눈살을 찡그리는 일이 벌어지곤 해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이 괜스레 불안했다. 놀랍게도 정오를 넘긴 시간에 어르신을 다시 만났다. 종로3가역 3·5호선 환승 계단에서였다. 어르신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은 수많은 어르신 중 한 명으로 존재했다. 어르신을 비롯해 모인 분들은 특별한 약속이나 뚜렷한 목적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딱히 모여 있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해 모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르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늦은 저녁 한강공원에서 어르신을 다시 만났다. 어르신은 급식버스를 기다리지도, 폐지를 줍지도 않으셨다. 산책로 부근 벤치에 앉아 어둑한 한강의 깊고 푸른 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어르신과 필자의 하루가 지나갔다. 아마도 어르신은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비슷한 일과를 반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관의 시선으로 어르신들의 노후생활을 바라보자는 건 결코 아니다. 필자가 만난 어르신의 일상이 모든 노인의 일상을 대표하는 것 역시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고단한 하루를 견뎌낸 노인이 바라본 한강은 어떤 의미였을까.

속단하긴 어렵지만, 광속의 서울시 한복판을 살아가는 어르신들에게 한강은 근대화와 초고속 성장을 경험한 보람과 뿌듯함이 사라지고 슬픈 소외의 상징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분단국가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서울은 세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메트로폴리스로 성장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통해 고도성장과 그에 걸맞은 문화인프라를 구축하게 됐다. 한강의 기적이 가능하게 된 중심엔 의심의 여지 없이 지하철에서 무료신문을 줍고 종로3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고독한 눈빛으로 한강공원 벤치에서 하루를 보내는 어르신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오늘의 한강은 그러한 어르신들의 땀과 노력을 부러 외면하거나 지나치게 무심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이런 인상을 지우기 위한 사회적 차원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단지 복지 사각지대로 밀려난 어르신들의 생존권 보장이나 일괄적인 복지수준 개선 문제로만 접근해선 곤란하다. 밥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에게 그들의 땀과 노력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진심의 전달, 그에 따르는 정서적·감성적 쉼을 허락할 수 있는 포용력의 확대는 결국 한강의 기적을 단순한 경제성장의 전리품이 아닌 따뜻한 연대로 받아들이는 인식 전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최근 어르신들의 유튜브 편중 현상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잦아지고 있다. 탄핵 이슈가 커질수록 레거시 미디어에 관한 불신은 높아지고, 그 틈새로 몇몇 유튜버들이 확인되지 않은 가짜뉴스를 반복 재생산해 다수의 갈 곳 없는 어르신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어르신들에게 미래세대를 향해 가져야 할 건전한 염려와 지혜를 상실케 하고 묻지마식의 음모론을 양산해 뜻 모를 불안만 키우는 게 독초처럼 번져나간다면, 이 또한 지나친 우려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서울,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수많은 어르신에게 소외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도록 하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한강의 기적에 대한 어르신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일군 한강의 기적을 이제는 함께하는 여유와 따스함으로 끌어안는 생각의 전환 말이다.

주원규(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