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분리수거장마다 붙어 있는 공지문은 왜 투명 페트(PET)병 분리배출을 신신당부할까. 현재 재활용 기술로는 투명 플라스틱만을 따로 분류하지 않으면 재활용에 쓰일 원료의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리수거한 페트병이 재활용을 거쳐 다시 온전한 페트병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2021년 기준 재활용된 투명 페트병 중 73%는 옷감용 섬유 등 중·저급 원료로 활용됐다.
이런 현실이 몇 년 뒤에는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 국내 연구진이 효소를 통해 페트 물질을 친환경적으로 재활용하는 신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김경진 경북대 생명공학부 교수 연구팀과 CJ제일제당 연구팀은 0.58g 소량만으로도 1㎏ 페트병을 8시간 만에 90% 분해하는 효소인 쿠부(Kubu)M12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쿠부M12는 분해 속도, 용량, 효율성 모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뽐내며 생물학적 재활용 방식의 경제성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관련 논문을 게재한 뒤 친환경 재활용 생태계 구축을 위한 컨소시엄 준비에 여념이 없는 김 교수를 지난 19일 대구 경북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김 교수가 구상하는 ‘재활용 컨소시엄’은 사용된 플라스틱 수급부터 플라스틱 분해와 원료 생산, 재활용 원료를 통한 제품 생산까지 연계하는 기업들의 연합체다. 재활용의 산업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김 교수가 대표를 맡고 있는 경북대 산하 기술지주회사인 ㈜자이엔은 컨소시엄에서 플라스틱 분해와 원료 생산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국내 리사이클 기업, 화학 기업, 전략적 투자(SI) 업체들과 함께 생산 규모를 검토하고 시범 생산설비 구축 방안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생물학적 플라스틱 재활용 기술은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업화까지 과정에 걸림돌이 많은 ‘계륵’ 같은 존재였다. 페트를 열로 녹이거나 용매로 분해하는 기존의 기계·화학적 방식의 경우는 재활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이 한정됐다는 점과 열을 가하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배출되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다. 반면 생물학적 방식은 촉매가 페트에 선택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다른 플라스틱 이물질이 섞여 있더라도 재활용이 쉽고 영구적으로 똑같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재활용 방식은 지난 2000년 네이처에 게재된 논문이 산업화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시한 뒤 20년 넘는 세월 동안 경제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김 교수는 “분해를 위해 선택된 자연 상태 효소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 인간이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효소가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양의 효소를 투입해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채산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김 교수 연구팀은 더 좋은 능력을 가진 효소를 선별한 뒤 개량해 프랑스의 카비오스 등 생물학적 재활용계 선두주자의 성과를 뛰어넘는 분해 기술을 개발했다. 우선 단백질 간 연관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서열 데이터 지도를 그려 수만개 효소 중 분해 능력이 뛰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230개 효소를 분류했다. 연구진은 230개 후보 가운데 실험을 통해 가장 성능이 좋은 쿠부를 찾아낸 뒤 효소 공학을 통해 쿠부M12로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쿠부M12는 연구팀과 CJ가 특허를 공동 소유하고 있다. 김 교수는 “논문 게재 이후 생물학적 분해 방식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업체들의 연락이 오고, 복합필름 업체에서도 적용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시료를 의뢰해 왔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연구팀은 쿠부M12 공개 이후에도 분해 속도와 능력을 업그레이드한 효소 개발에 돌입해 추가 개량에 성공했다. 분해 과정의 원료가 될 쿠부 개량 효소의 대량생산 방법 역시 CJ와 함께 연구 중이다. 유럽연합(EU)이 수입 제품의 재생원료 사용 의무비율을 2030년까지 30%로 올리는 등 전 세계적으로 재활용 플라스틱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기술력 발전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사업화가 가능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사업화를 위한 추가 과제로는 재활용 생태계 조성을 통해 값싸고 안정적으로 원료를 조달하는 방안 마련이 꼽힌다. 재활용하고 싶어도 고품질 재활용 재생원료가 부족해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오는 것이 현재 국내 재활용산업의 현실이다. 반면 기존 기술로 재활용이 불가능한 플라스틱은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처리 비용이 드는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김 교수는 “컨소시엄을 통해 재활용 가능 플라스틱의 범위와 회수율을 높이면 소비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재활용 플라스틱 가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의 다음 목표는 재활용 기술의 산업화를 통해 친환경 플라스틱 재활용을 활성화하고, 성장 정체기에 빠진 한국 화학산업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는 “국내 화학과 섬유 업체들이 우리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결국 중국과의 경쟁에 대비하기 위해 재활용과 같은 새로운 산업군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라며 “앞으로 컨소시엄과 함께 국가 연구과제를 수행해 플라스틱 재활용 산업화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대구=글·사진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